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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y 27. 2020

피해자와 당사자, 그리고 활동가

건강한 긴장과 갈등이 필요한 관계에 대해

너는 윤미향 편인가, 그렇다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할머니들로 장사한 파렴치한이다. 너는 윤미향을 비판하는 쪽인가, 그렇다면 토착왜구다.


나는 생각은 많아지는데 할 수 있는 말은 사라진다. 대체로 우리의 생각은 양쪽 편을 넘나들기 마련이다. 나는 당파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파성에 입각한다고 그것이 이 당파와 저 당파 사이를 모세가 홍해 가르듯 가르는 것은 아니고, 그 경계를 누구의 시선과 누구의 입장에서 넘나 드느냐가 당파성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연과 윤미향 당선인 논란에 대해 내 주변의 많은 활동가들은 넘치는 생각과 감정에 비해 말을 극도로 아꼈다. 이 참담한 악다구니에 끼어들 틈도 없고, 틈을 만들 여력도 없고, 보고 있는 것만도 버거우니까. 그러다 보니 던져야 할 질문들, 정말 필요한 비판과 논쟁은 더더욱 숨어버렸다. 진영논리에 입각한 왜곡과 음모만 판을 친다.


그 와중에도 묵묵히 해야 할 말을 쌓아가는 이들도 있다. 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래군의 글평화학자 정희진의 글을 읽고선 지긋지긋하고 짜증스러운 상황에 지지 말고 나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두 글 모두 사회운동에 중요한 지점을 다루는데, 나는 박래군의 글은 활동가와 당사자의 관계를 성찰한 글로, 정희진의 글은 사회운동이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마주하는 글로 읽었다. 두 문제에 대해 내 생각이 아직 영글지는 않았지만 두 문제의 속성상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내 생각을 더 진척시켜보고자 이 글을 쓴다.


물론 여전히 걱정이 된다. '과연 나는 꼭 필요한 이야기를 보태는 걸까? 이 난잡한 상황에서 나 혼자 잘났다고 으스대는 건 아닌가? 과도하게 비난당하는 윤미향 당선인에게 돌멩이 하나 더 던지는 건 아닐까? 혹은 나도 활동가라서 팔이 안으로 굽어 사회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윤미향을 실드 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뭐라도 써야 속이 시원하겠고, 뭐라도 써야 생각이 좀 더 진척될 수 있을 거 같아서 쓴다. 먼저 박래군의 글을 읽으며 활동가와 피해자, 당사자의 관계에 대해 써 보았다. 이어지는 두번째 글에서는 정희진의 글을 읽으며 든 생각들-사회운동이 대중성이나 보편성을 획득한 뒤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다.






피해자, 당사자, 활동가


지금 대부분 언론 기사는 이용수 님과 윤미향 당선인 사이의 갈등을 피해자와 활동가 사이의 갈등으로 단순화시켜서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 이게 그리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내 머릿속에서 개념부터 정리해본다. 모든 당사자가 피해자인 건 아니다. 나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은 병역거부 운동의 당사자지만 우리를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병역거부자들이 병역거부 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은 분명 국가 폭력의 피해 사례이지만, 피해를 입은 모두를 피해자로 호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나는 나를 피해자가 아니라 저항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사자 혹은 피해자가 활동가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당사자/피해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운동에서 중요한 활동가가 되곤 한다. 대표적으로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황상기 님이 있다. 고 황유미 님의 아버지로 유가족인 그는 분명 자기 딸자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문제에 뛰어들었겠지만, 지금 황상기 님은 반도체 공장 산재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활동가다. 피해자와 당사자와 활동가는 이처럼 서로 겹치기도 하고 나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당사자/피해자에서 시작해 활동가로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사자/피해자 혹은 활동가 그룹은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당사자나 피해자는 문제를 지나치게 개인화시킬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활동가들을 자원봉사하는 사람으로 대하기도 한다. 반면 활동가는 운동의 대의에 집중한 나머지 당사자/피해자의 개별성을 무시하거나 개인적인 욕구를 억압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피해자를 운동의 도구로 대하기도 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운동 내부에서 당사자, 활동가, 피해자 사이에 건강한 긴장과 갈등이 필요하다.



피해자, 당사자, 활동가 사이의 다이내믹


그런데 당사자와 활동가, 피해자 사이의 다이내믹은 생각보다 복잡해서 긴장과 갈등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게 무척 어렵다. 이번 이용수 님과 윤미향 당선자 사이에 드러난 갈등도 그간 위안부 운동에서 활동가들과 당사자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건강하게 조율되어오지 않았던 것이 윤 당선인의 출마를 계기로 폭발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 다이내믹이 어려운 까닭은 원래 긴장과 갈등을 다루는 일이 어려운 일인 까닭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 주체에 속한 개인들의 욕망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병역거부 운동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병역거부자들은 그저 전과 기록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어떤 이는 감옥 생활에 대한 국가 배상을 원하며, 또 다른 이는 감옥은 자신이 택한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없고 징병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고유한 양심을 가진 개인이니, 욕망도 다르고 어떤 욕망도 옳거나 그름의 영역은 아니다.


병역거부운동은 이 모든 것을 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더 중요하게 하는 일이 있고 덜 중요하게 하는 일이 있다. 사실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 지점에 대한 생각과 욕망은 제각각이다. 어떤 활동가는 모병제 도입을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활동가는 모병제는 절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들은 늘 당사자/피해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활동가로서 내 의견은 다르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사자/피해자의 뜻을 절대화하는 운동은 실은 피해당사자를 대상화시킨다. 윤미향 당선인이 후배 활동가들에게 "피해자 앞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여라"라고 말한 것이나, 정의연이 할머니들을 이용해먹었다는 이용수 님의 말(물론 나는 이용수 님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맥락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여성인권 운동 단체인 정의연이 할머니들의 피해자성을 너무 과도하게 홍보했다는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은 사실 거울쌍이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며. 이때 권력은 의견을 내는 쪽이 아니라 수용해주는 쪽에 있다. 활동가들이 당사자와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면 박 터지게 싸워야 할 때도 있다.


두 번째로는 당사자/피해자의 욕구와 입장이 늘 옳은 것은 아니고 어떨 때는 운동의 원칙과 어긋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를 예로 들자면 가장 큰 당사자 집단인 여호와의증인은 대체복무 심사위원회의 독립성이 보장된다면 전쟁 게임을 즐기는지가 기준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당사자의 입장을 따라야 한다면 병역거부 운동이 이 입장을 따라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이 방식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말한 것처럼 당사자들 피해자들도 동일한 욕망을 가진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다. 사회운동은 서로 다른 당사자들 사이의 욕망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다.



사회운동 주체들 사이의 서로 다른 욕망을 조율하고 합의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시작


결국 사회운동은 운동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주체들-당사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욕망이 서로 갈등하고 경합하는 장이다. 주체들끼리의 욕망이 다르고 주체에 속한 개인들끼리의 욕망도 다르다. 욕망이 드러나는 분야도 다르다. 정치적 욕망은 운동의 대의나 목표와 연관되어 있고, 경제적 욕망은 피해자의 경우 피해 보상에 해당하고 활동가의 경우 생계 유지와 연결될 거다. 사회적 욕망은 당사자의 경우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을 거고 활동가의 경우는 사회운동이 직업인 만큼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다. 누군가는 정치적 욕망이 다른 욕망에 앞설 거고, 어떤 이는 사회적 욕망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경제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약간은 터부시 되지만 나는 그 욕망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운동이 지속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욕망이라고도 생각한다.


정답이 있을 리도 있을 수도 없다. 늘 건강한 갈등 속에서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사회운동 주체들끼리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기득권-정부, 언론, 거대 기업, 때로는 패러다임처럼 거대한 인식 체계-와 맞선다.


활동 주체들 간의 건강한 긴장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고, 아무리 능숙한 활동가들도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합의에 실패한 사회운동은 대개의 경우 지지부진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데 반대로 언뜻 보기에 저돌적으로 잘 나가는 경우도 있다. 독단적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 뜻대로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때로는 그런 방식이 효율적인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긴 호흡으로 보자면 그런 경우는 나중에 운동의 사유화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납작한 말들 너머 건강한 비판과 토론을 바라며


아무튼 사회운동에서 피해자, 당사자, 활동가의 관계나 역할을 논할 때는 이 복잡한 다이내믹을 이해해야 한다. 이게 어려운 것이 각각의 운동마다 특수하게 때문이다. 운동의 역사, 참여한 사람들의 성향 따위에 따라 갈등의 양상, 방식, 강도가 제각각이다. 병역거부운동의 다이내믹을 이해한다고 해서 ‘위안부’ 운동의 다이내믹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활동가들이 당사자/피해자를, 혹은 당사자/피해자들이 활동가를 바라보고 대할 때 이 서로 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를 해야지, 서로를 정형화된 이미지에 가두어 두고 이야기를 이어가서는 안 된다. 활동가들이 당사자를 '불쌍한 피해자'로 바라보거나 '피해자 앞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여라'라고 이야기하는 건 결국 당사자/피해자를 운동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운동에서 당사자/피해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로 소비되는 도구가 된다. 마찬가지로 당사자/피해자들이 활동가의 헌신이나 노력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이런 운동에서는 활동가들은 헌신하다 헌신짝처럼 버려진다. 두 경우 모두 해당 사회운동이 바라는 사회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꼭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주체들에게만 요구되는 건 아니다. 사회운동을 다루는 언론, 혹은 사회운동을 지켜보며 비판하기도 하고 지지하기도 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한데 지금 상황은 그래 보이질 않는다. 복잡한 다이내믹을 이해하는 노력이 비판의 말들 속에 스며들어 있으면 좋겠다.


납작한 말들과 진영론에 입각한 비난으로는 피해자는 운동의 도구가 되고 활동가는 헌신하다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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