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해고
예나 지금이나 취업이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2004년 2월 대학을 졸업하면서 운 좋게 바로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딱히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이 일을 자원봉사 정도로 여겼지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부모님의 그런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부모님께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전쟁없는세상은 활동가들에게 교통비만 지급했는데 생계비를 지급할 능력이 안 되기도 했고, 활동가들 또한 돈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를 바랐다. 우리가 만든 단체여서 고용된 입장이기보다는 자영업자 같은 느낌이 강했고, 다들 젊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비를 벌어야 했는데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 논술학원 첨삭 아르바이트였다.
1600자 논술 한 장을 첨삭하면 받는 돈이 1만 원이었는데, 주말에만 일해도 한 달에 100만 원은 벌 수 있었다. 맥주 500cc 한 잔이 2000원 남짓하던 시절이니 제법 큰돈이었다. 쉽게 돈을 벌었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평화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인 학벌 사회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학원에 더 이상 일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아침형 인간인 나는 주로 아침에 하는 일을 찾아봤다. 새벽에 나가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했는데, 시간당 급여는 쏠쏠했지만 총 급여가 적어서 그만뒀다. 그러고 나서 찾은 일이 대형 식당 주방 보조 일이었다. 아침에 출근해 점심 식사를 만들고 뒷정리까지 하고 퇴근하면 남는 시간은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보건소에서 필요한 서류를 떼어 면접을 보러 갔다. 주방장은 이력서를 보더니 의아해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왜 경력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냐고 물었다. 당황했지만 대충 둘러댔고, 어쨌든 면접을 통과해 다음 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식당은 종로5가역에서 이화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어가는 거리에 있었다. 제법 고층 빌딩이었고,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매일 1300인분의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큰 식당이었다. 과연 1300인분은 어마어마했다.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 때면 전기밥솥 크기만 한 깡통에 든 마요네즈가 여러 통 필요했고, 튀김 요리가 있는 날은 약수터 물통만 한 기름통을 몇 통씩 써야 했다.
가장 힘든 일은 새벽에 배달 온 재료를 주방으로 나르는 일과 음식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었다. 이런 식당은 속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톱니바퀴처럼 세팅된 시스템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했다. 재료를 이동식 수레에 가득 쌓아서 빠르게 운반해야 했는데 나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수레를 여러 차례 벽에 갖다 박았다. 워낙 겁이 많은 성격이라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재료가 상하지는 않았지만, 나 때문에 전체 시스템이 어그러지자 주방장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더 힘들었다. 내 허리 높이의 음식 쓰레기통이 날마다 세 통씩 가득 채워져 나왔다. 그걸 가지고 가 음식물 수거통에 버리는 일이었는데 쓰레기를 쏟아부어야 하는 높이가 내 허리보다 높았다. 한 번에 번쩍 들어 올리지 않으면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이었는데, 고된 식당일의 마지막 코스였던지라 내게는 내 몸 크기의 절반이나 되는 음식쓰레기 더미를 들어 올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만 버리면 퇴근이라는 생각에 없는 힘까지 짜내 통을 들어 올렸다가 이러다 허리 나가겠다 싶어서 내려놓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겨우겨우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점심 식사 준비를 마치고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내려오기 전 30분 정도 쉬는 시간이 있었다. 말이 쉬는 시간이지 그때가 식당 직원들의 식사 시간이었는데, 나는 밥을 먹을 기운도 없어 휴식 공간에서 쓰러져 코를 골며 잤다. 다른 분들은 내 코 고는 소리를 반찬 삼아 허겁지겁 식사를 해치웠다.
그렇게 일주일을 겨우겨우 버텼다. 몸살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금요일 마지막 음식 쓰레기통을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주방장이 나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용석 씨는 월요일 날 출근 안 해도 돼요.”
무슨 의미인지 의아할 여유도 없이 난, 주말에 쉴 생각에 들떠서 대답했다.
“네! 그러면 화요일 날 출근할게요.”
그제야 주방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머뭇 말을 이어갔다.
“아뇨, 화요일도 안 나와도 돼요... 용석 씨는 이 일과는 안 어울리는 사람 같아요.”
해고였다. 덩치도 작고 힘도 세지 않은 데다 요령까지 없으니 나는 그곳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아니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주방장의 이야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쓸모없던 사람으로 존재해본 경험이 없는 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급한 건 돈벌이였다. 결국 나는 바로 학원에 전화를 걸어서 아직 자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비가 왔던가. 아니면 내 기분이 비 오는 날 같았나. 낭패감 밀려왔다.
낭패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홍세화 선생님 말씀 덕분이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굉장히 심했던지라 우리에겐 버팀목이 필요했고, 홍세화 선생님께서는 기꺼이 단체 후원회장을 맡아주셨다. 연초에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입시 사교육 시장에서 돈을 벌어 평화운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생님은 그때 ‘학벌없는사회’라는 단체에서도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셨던 터라 마치 고해성사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홍세화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내 신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프랑스에서 오랜 망명 생활 끝에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있다고 하셨다. 한국의 대학생 활동가들은 대다수가 100퍼센트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놀랐고, 졸업한 뒤에는 그들 중 많은 수가 100퍼센트로 올바르게 살 수 없게 되면 올바른 삶을 살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0퍼센트의 삶을 사는 것에 더 크게 놀랐다고 하셨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의 위치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건지라고 하셨다. 본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삶은 0퍼센트와 가까운 쪽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면서, 조금씩 0퍼센트에서 멀어지고 100퍼센트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여주셨다.
젊고 또 젊었던 당시의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도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벽하게 나무랄 데 없는 활동가가 되고 싶었고, 알량한 내 학벌이나 학력을 이용해먹지 않고 솔직한 몸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결국 나의 도전은 능력 부족으로 실패했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실패가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홍세화 선생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딱히 위로하려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씀 덕분에 나는 나의 실패를 부끄럽지 않게 여길 수 있었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른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15년 전보다는 가진 게 많은 삶이 되었으니 지금의 난 0퍼센트에서는 조금 멀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홍세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의 위치가 아니라 위치가 어떤 방향 쪽으로 옮겨가느냐다. 오늘도 난 15년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어제 보다 한발 짝 더 100퍼센트에 가까운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