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Jul 26. 2020

천하의 김응용, 김성근도 낡은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까


세상의 변화는 멀리 떨어져서 보거나 변화가 지난 후에 보면 쉽게 감지되지만, 변화의 한복판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은 가차 없다. 변화를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낡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훌륭한 사람들도 그러하니 나는 내가 어느 순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낡은 사람이 될까 늘 두렵다.     



오점으로 마무리된 역사, 김응용과 김성근


변화에 대해 생각할 때면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김응용과 김성근. 둘 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감독이지만 말년에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불명예스럽게 소속팀에서 물러났다.

      

김응용 감독은 한국시리즈 10회 우승(해태 타이거즈에서 9번, 삼성 라이온즈에서 1번)과 감독 최다승(1567승)을 기록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3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팀을 운영했다. 무리한 훈련을 지양하고 선수들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훈련하도록 했다. 간염으로 체력적인 문제를 겪으며 프로야구에 적응하지 못했던 한대화 선수는 해태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지연이나 학연, 혹은 이름값에 얽매이기보다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운영했다. 덕분에 홍현우, 이대진, 장성호 같은 고졸 신인들도 충분한 기회를 받을 수 있었고 슈퍼스타로 발돋움했다.      


김응용 감독이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2002년, 상대팀은 LG 트윈스였고 감독은 김성근이었다. LG는 비록 준우승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두 팀은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펼쳤다. 한마디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였다. 김응용 감독은 우승 인터뷰에서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남겼고 그것은 이후 김성근 감독의 별명 ‘야신(야구의 신)’이 되었다. 김성근 감독이 빛나는 건 몇 년 뒤 SK 와이번스 감독이 되어서다. 2007년부터 2011년 중도 퇴진할 때까지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일궜다. 김성근의 SK는 강력한 수비와 치밀한 작전 야구로 프로야구의 트렌드를 바꿨다. 이 시기 한국 야구는 크게 보면 모두 김성근 야구 스타일 안에서 다양한 변주에 불과할 정도였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감독인 두 사람은 말년의 커리어에서 비슷한 길을 걸었다. 김응용 감독은 2013년~2014년 한화 감독을 끝으로, 김성근은 2015년~2017년 한화 감독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둘 다 마지막 시즌 성적이 처참했다. 김응용 감독의 마지막 시즌은 승률 0.389로 리그 꼴찌였고, 김성근 감독은 2017 시즌 성적 부진으로 중도 퇴진을 했는데 한화를 그해 승률 0.430로 10개 구단 중 8위를 했다. 성적만 나쁜 게 아니었다. 두 감독은 끊임없이 선수 혹사 논란에 시달렸고, 김성근 감독 시절엔 당장의 승리를 위해 팀의 유망주를 트레이드 카드로 쓴 나머지 구단의 미래까지 망가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두 감독의 말년이 비참했던 이유는 두 감독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용납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지만 두 감독은 예전 방식을, 자신이 성공했던 방식을 고수했다. 선수단의 컨디션이나 부상에 대한 관리 개념이 없던 80~90년대, 승리를 위한 관점에서만 관리할 뿐 선수 생명을 고려하지 않았던 2000년대와는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두 노장 감독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시절 가장 앞장서서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온 이들도 결국 나중에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도태된다는 것이 굉장히 서글프다.     



비극적인 사건이 보여주는 시대의 변화


김응용, 김성근 감독을 떠올리게 된 건 박원순 시장의 충격적인 죽음과 그 이후 이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논쟁적인 이슈에 편이 확 갈린다고 하는데 이번 이슈는 특별히 더 그러해 보인다. 편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게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시절의 박원순을 기억하거나 그와 함께 활동했던 세대들은 그의 죽음을 먼저 슬퍼하는 편이었다. 서울시장 박원순이 익숙한 세대는 피해자가 겪은 일에 감정을 먼저 이입했다.


나는 사실 양쪽 모두가 이해가 가는데, 굳이 말하자면 박원순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공적인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이나 사회에 이름 알려진 명망가들이 공개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공적인 애도와 추모는 정치적인 행위라고 생각하고, 특히 정치인이나 명망가들의 추모는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명시적인 2 가해를 하는 이들과 피해자에 대해 침묵한  고인을 추모하는 이들, 그리고 피해자를 옹호하면서도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지점과 수위 모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또한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는 아니니 패스)


이제는 우리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젠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이며, 권력은 젠더와 무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잡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더불어 고인을 애도하는 게 이 시대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에 대해 세대 격차를 이야기하지만, 그 진단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진단하는 게 썩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대 간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건데 그걸 원인으로 지목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디선가 봤는데, 지금 이 격차는 세대 차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시대가 변했는데 그 변화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지하고 싶지 않은(혹은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의 격차라고 말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싶다. 그때는 용납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는데 이를 인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 말이다.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는 변화를 감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변화에 민감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지만 그게 말로만은 되는 일이 아니란 걸 안다. 노력은 필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김응용과 김성근, 혹은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직면해 피해자보다는 고인에게 먼저 감정이입 하는 많은 분들을 그저 변화에 뒤쳐진 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버릴 수는 없다. 개인의 노력이란 때때로 시대와 구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기도 하니,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한 것을 개인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떤 노력을, 누구와 함께 해야 할까? 내가 살아가고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하면 감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잘 흔들릴 수 있을까? 과연 누가 그 대답을 알까?

작가의 이전글 태영호 의원의 질의에서 색깔론보다 더 문제인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