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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15. 2020

잠만보가 되고 싶어

불면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어렸을 적부터 학습된 습관인지, 나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잠든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 시절을 지나 중학생 때도 나는 밤 9시에 잤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일찍 잤냐고 물었더니, 병상에 누운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엄마가 당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억지로 재웠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타고난 것이기보다는 학습된 습관이겠다.


대학생 때도 참 잘 잤다. 잠을 엄청 많이 자고 그런 건 아닌데, 무슨 신데렐라 마냥 12시쯤 되면 졸렸고, 졸리면 잠을 이기지 못했다. 다시 깨거나 잠을 설치더라도 일단 잠드는 것은 쉽게 잠들었다.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 일찍 자고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대학시절 나는 교문 앞 선전전을 하는 아침마다 창언이, 송이, 선미네 자취방을 돌며 사람들을 깨우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아침형 인간은 성실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사회생활에 유리하다. 아침형 인간이라서 나는 총학생회장 후보도 해봤다. 그때 나 말고도 총학생회장 후보를 하겠다고 나선 친구들이 3명이나 더 있었는데, 물론 나 혼자 남성이고 문과대학 학생회장이었던 게 내가 후보로 뽑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한몫했을 거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도 내 잠을 막을 순 없었다. 예를 들면 겨울에 빈민현장활동 가서 관악구청 앞에서 차가운 길바닥에 돌돌이 깔고 비닐 덮고 자는 날에도 나는 누우면 잠들었다. 선배의 자취방에서 선배와 사회 문제에 대해 격하게 토론하는 와중에 갑작스레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기도 하고, 거리 집회 때는 사수대 같은 걸 나가서 경찰(폭력진압으로 악명 높은 1001부대)과 대치 중에 무서운 마음 한가득인데도 잠이 오면 꾸벅꾸벅 전투경찰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불면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하루 종일 형광등을 끄지 않는 감옥에서도 깊게 잠들지 못해서 중간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을 뿐이지, 잠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깨고 나서도 다시 쉽게 잠드니 중간에 깨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잠들지 못해 고생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등만 붙이면 자고 차만 타면 자는데, 길바닥에서도 감옥 안에서도 잠만 잘 들었는데. 잠이 안 오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리둥절할 일이 내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년, 난생처음으로 아시아를 벗어나면서 내가 시차에 이렇게 취약한지 처음 알았다. 쿠바에서 일주일 여행을 하고 콜롬비아에서 일주일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일정이었는데, 쿠바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낮에도 잠을 못 자고 밤에도 잠을 못 잤다. 낮에는 덥고 밝아서, 밤에는 사실상 한국에서는 낮시간이었기 때문에 몸이 깨어 있었다. 14시간의 시차는 내게 너무나 힘든 경험이었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자지 않는 시간을 견뎌야 했고, 낮이면 졸음으로 몽롱한 정신으로 걸어 다녔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밤에 잠을 자고 낮에 온전히 깨어있게 되었는데, 그게 시차에 적응한 것인지 쿠바의 더위와는 사뭇 다른 콜롬비아 보고타의 서늘함 덕분이었는지 당시에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아메리카 시간대


달라스에 사는 큰이모가 많이 아파서, 엄마를 모시고 달라스에 왔다. 지금 4일째 머무는 중인데, 밤에 잠을 많이 못 자서 정신이 몽롱하다. 달라스는 덥긴 하지만 습도가 높지 않고 주로 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여름보다 서늘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렇지만 여전히 밤에 잠을 못 자고 낮에는 몽롱한 것을 보니, 작년 쿠바에서의 경험이 더위보다는 시차 때문이었던 게 확실해진다. 몽롱한 정신에 사촌들과 영어로 대화하다보니 두통도 살짝 있어서 책도 못 본다.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작년처럼 일주일 정도 머물고 나면 이곳의 시간에 적응하겠지. 그러고 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나마 한국의 시간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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