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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20. 2020

슬기로운 격리생활1

일상성과 예외성 


미국에 다녀왔다.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코로나가 더 심각해졌다. 특히 내가 사는 동네인 파주가 난리가 났다. 인천공항에서 안내에 따라 코로나 관련 여러 서류를 작성하고 파주, 고양, 김포 시민에게 배정된 버스를 타고 킨텍스로 향했다. 킨텍스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해외 입국자 전용 주차장에서는 각 시별로 공무원이 나와 있었다. 나는 파주시의 버스를 타고 조리읍에 위치한 민간 연수원으로 이동했다. 해외 입국자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곳으로 파주시가 임대한 듯 보였다. 


영화 <괴물>의 격리시설을 생각했던 나는 대기업 연수원의 1인실을 보고는 안도했다. 숙박도, 식사도, 코로나 검사도 다 무료였고, 오가는 것도 다 알아서 해줬다. 식사는 비록 채식 식단을 고를 수는 없지만 퀄리티가 나쁘진 않았다. 검사는 결과는 다행히 음성으로 나왔고 나는 이제 집에서 본격적으로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둘째 날 점심으로 나온 낙지비빔밥, 흑임자죽, 동치미, 튀긴 만두, 백김치, 가지무침. 세 끼 모두 퀄리티가 제법 좋았는데 채식으로는 주문할 수 없다고 한다. 


14일은 길면서도 짧은 기간이다. 마냥 쉬거나 놀기에는 길고, 그렇다고 뭔가를 도모하기에는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기간.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시간만 속절없이 지나버릴 수 있다. 물론 재택근무로 전쟁없는세상 일을 하지만, 나는 원래 재택근무가 잘 맞는 편은 아니다. 하염없이 딴짓을 하게 되니 마음을 제대로 다잡을 필요가 있다. 


그러다 문득 감옥 생활을 떠올렸다.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낸다는 점에서, 시간이 하염없이 넘친다는 점에서 격리생활이 감옥생활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감옥생활을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려본다. 슬기로운 격리생활을 위해 슬기로웠던(?) 감옥생활을 참고해봐야겠다. 



일상성, 지루함과 무료함에서 시작되는 긍정의 에너지 


감옥생활을 버티게 한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다. 감옥 밖 사람들. 친구들과 가족. 나를 아끼고 신경 써주는 사람들의 마음 담긴 편지가 없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감옥의 지루하고도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사람들이 아니라 내 몸에 각인된 루틴이었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루틴을 만들려고 애썼다.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해서 몸과 정신을 깨웠다. 커피물이 오면 찬물과 섞어서 머리를 감고 나서 시를 읽었다. 기상 점검을 받고 나서는 영어공부를 하다가 아침밥을 먹었다. 배를 두드리며 잠시 쉰 뒤에는 오전 나절 동안 어렵고 진도 안 나가는 책을 읽었다. 주로 인문학, 사회과학 책을 읽었다. 점심 먹고 나서 오후 시간 동안 소설책을 비롯해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을 봤다. 그 중간중간 면회가 오면 면회를 나가고, 운동 시간이 되면 운동장을 달렸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주로 그날 온 편지와 신문을 보고, 편지에 답장을 썼다. 독방에 있을 때는 거의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고, 혼거방에 있을 때는 좀 맘 편히 재밌는 프로그램들이 나올 때는 독서를 멈추고 텔레비전을 봤다. 어차피 집중도 안 되니까. 교도소나 구치소마다, 혹은 출역장마다 패턴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대충 이런 루틴을 계속 쌓아갔다. 


루틴은 일상성이다. 일상이 무너지면 마음이 무너지고 몸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언젠가 친구한테 루틴은 지키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루틴을 지켰을 때 오는 안정감도 필요하겠지만, 내 경우엔 루틴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에너지가 일상의 무료함과 지루함을 능동적인 것으로 바꿔주는 윤활제였고, 그게 핵심이었다. 루틴을 지킬 수 없게 되면 또 다른 루틴을 만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예외성, 소소함 즐거움을 안겨주는 예외적 상황 


삶은 때때로 우연한 사건을 원한다. 사람마다 조금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우연한 사건을 반기는 편이다. 우연한 사건이 없다면, 모든 것이 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대도 재미없을 것이다. 감옥에서 일상성을 지켜가는 와중에도 일상성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시간들, 사건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면회와 편지다. 일상은 반복이 핵심이다. 반복적으로 같은 일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수행하는 것. 그래서 머리보다 몸이 기억하는 패턴을 만드는 것이 일상성, 즉 루틴의 힘이라면, 면회와 편지는 그러한 일상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은 기분 좋은 통증 같은 것이다. 내 계획이 틀어진 틈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늘 내 계획이 틀어지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기다림은 감옥에서 지루함을 견디는 또 하나의 중요한 힘이었다. 오지 않은 편지를 기다리고, 오지 않은 면회를 기다렸다. 결국 안 오더라도 기다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탄탄한 일상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가끔씩 찾아오는 균열과 그 틈에서 발산되는 희열, 그거면 충분했다. 



슬기로운 격리생활을 위하여 


고작 14일 밖에 안 되지만, 이 기간이 뭔가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 되거나 내 인생에 엄청난 계기가 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알차게 보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루틴을 만들기로 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되어서인지 지난밤에 엄청 일찍 자고 새벽 5시에 깼다. 잠깐 뒤척이다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요가매트와 폼롤러도 주문했다. 매트가 오면 스트레칭과 홈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다.(자가격리자 안내문에 자가격리자에게 좋은 홈트레이닝을 소개해놓은 인터넷 카페 주소가 있다.) 조기를 구워 아침을 먹고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을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서평도 써야겠다. 이제 9시가 되면 평소처럼 옷을 입고 전쟁없는세상 업무를 시작할 것이다. 6시가 되면 퇴근하겠다. 퇴근 후에는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또 홈트레이닝을 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야구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본다. 기아가 이기면 계속 야구를 보겠고, 요즘 분위기 같아서는 자가격리 기간 동안 야구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게 될 거 같다. 밤에는 글을 쓸 것이다. <평화는 처음이라> 초고를 6월 말까지 정리하겠다고 했는데 아직 60퍼센트 밖에 못했다. 격리 기간 동안 다 끝내야겠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이렇게만 하면 루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을 이 힘으로 버틸 수 있다. 고작 2주밖에 안 되니까. 그치만 예외적인 사건들도 일어나면 좋겠다. 예외적인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기획하거나 노력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면 예외가 아니다. 내 일상에 기분 좋은 균열을 내고, 생동감 넘치는 긴장감을 전해줄 그런 예외적인 사건들을 기대해본다. 



매일 아침 10시와 저녁 8시에 체온을 체크하고 자가격리자 어플을 통해 담당 공무원에서 점검 내용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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