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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20. 2020

안녕히 가세요, 큰 이모

큰 이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4일 만에 엄마를 모시고 달라스로 향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기 싫었다. 비행기 오래 타는 것도 싫었고, 다녀와서 자가격리 2주 동안 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엄마가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달라스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로 해외 드나드는 게 더 복잡해진 상황에서 엄마만 혼자 보낼 순 없었다. 큰 이모를 마지막으로 본다는 생각도 중요한 이유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 미국으로 이민 간 큰 이모는 사는 동안 대여섯 번 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이모들에 비해 정이 더 두터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엄마를 모시고 미국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미국에 처음 가봤다. 친척들은 대부분 사촌 결혼식 때, 그리고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둘째 이모 장례식 때 미국에 다녀왔다. 엄마는 둘째 이모 암 걸리셨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몇 달 동안 병간호를 했다. 내가 출소한 직후였고, 그러다가 이모가 돌아가셨다. 


이모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78년(혹은 79년) 미국 달라스로 이민을 가셨다. 동생과 나는 오랫동안 '미국 이모'라고 불렀다. 두 딸을 뒀는데 큰 사촌은 나와 동갑이고, 작은 사촌은 내 동생과 동갑이었다. 우린 만약 같은 나라에 살았다면 꽤나 친하게 지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큰 이모는 여러 차례 미국에 한 번 오라고 나한테 말씀하셨지만 나는 통 미국에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괜한 반미 감정에 그랬고, 나중에는 딱히 상황이나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어쨌든 비행기표값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울 엄마 아빠와 친척 어른들은 아직도 내가 미국 싫어해서 미국을 안 가는 줄 아신다. 이번에만 해도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에 갔다고 유난스레 나에게 고마움을 표할 정도다. 


8월 12일에 엄마를 모시고 달라스로 향했다. 거기서 일주일을 머물고 8월 17일에 출발해서 18일에 한국에 도착했고, 지금은 자가격리 중이다. 


미국 가기 싫었지만, 막상 가서는 좋았다. 이모를 만나서 좋았고, 사촌들을 만나서 좋았다. 사실 사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큰 기대도 없었다. 둘째 이모네 사촌이 나에게 물었다. 사촌들이 다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우리 사촌들 가운데 막내인 이 녀석은 그래도 초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미국에 갔다. 자신이 어렸을 때 봤던 형 누나들이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궁금한 것이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어렸을 적에는 사촌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는데 나이 먹고는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말고는 자주 연락하는 편이 아니다. 어렸을 때 만난 사촌들은 다들 착했는데,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모른다. 하물며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촌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마음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했다. 아 물론 나의 형편없는 영어 실력과 그보다는 좋지만 정치사회에 대해 토론할 만큼은 안 되는 사촌들의 한국어 실력 때문에 우리는 서로 뜻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느낌만을 공유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사촌들을 만나러 다시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서는 더 깊은 대화를 더 많이 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둘째 이모가 모셔진 납골당에도 갔다. 속절없이 눈물이 나왔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다가 왔다. 아들만 둘인 둘째 이모는 특히 내 동생을 귀여워했고 나한테도 엄청 잘해줬다. 이모네 식구들은 2000년에 미국으로 떠났다. 큰 이모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달라스로. 사촌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자기들이 장사를 했던 벼룩시장을 보여줬다. 유난히 뜨거운 텍사스의 햇볕이 그대로 내리 쬐는 곳에서, 이모네 식구들은 잡화를 팔았다고 한다. 사촌은 그리 말하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이 했을 고생이 선했다. 그 고생 끝에 둘째 이모는 암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큰 이모는 둘째 이모보다는 오래 사셨지만, 미국으로 와서 같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지금처럼 카카오톡이나 스카이프도 없었을 시절, 큰 이모는 전화요금 무서워서 제대로 전화도 못했을 것이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일 년에 두번 명절 때 전화를 해와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씀을 하셨다 한다. 내 기억엔 큰 이모는 전화 한 번 하면 놓지를 않는 분이었는데 그게 다 외로움 때문이지 않았을까. 미국에 다녀오면서 한인들의 미국 이주사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돌아와서 자가격리 3일째, 오늘 아침, 미국에서 소식이 왔다. 큰 이모가 돌아가셨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도, 거동을 거의 못하시고 음식도 조금 밖에 못 드셨다. 오래 버티긴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리 갑작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아침에 이모한테 인사드리면서 코로나 끝나면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이모는 별말씀은 없었고 대답도 안 하셨지만 눈을 뜨고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계셨다. 


멍했다. 천천히 실감이 난다. 내가 꼭 붙잡고 있던 이모의 손과 바짝 마른 몸과, 힘들게 움직인 입술 사이로 어렵게 부르던 내 이름. 그런 이모를 바라보던 사촌들의 슬픔 가득한 눈과 두 자매를 미국 땅에서 보내게 된 엄마의 큰 슬픔. 차라리 내가 미국에 가질 않았더라면, 이모를 한 번 더 안 보고 사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덜 슬펐겠지. 그치만 미국에 가서 이모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사촌들을 만나고 와서 정말이지 다행이다.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이모의 큰 딸, 나랑 동갑인 사촌이 자꾸 비행기 티켓 연장하고 더 있다가 가라고 했는데 그러질 않은 게 안타깝다. 이모가 이렇게 며칠 만에 가실 줄 알았으면 나도 더 머물렀을 텐데... 


이모,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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