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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ug 30. 2020

37.7도, 체온을 낮춰라!

슬기로운 격리생활 2

Q: 자신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A: 멘탈입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당황하지 않습니다. 기분 나쁜 상황에서도 화를 누를 수 있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멘탈로만 치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접전 상황에 올라오는 마무리 투수도 할 자신이 있습니다. 주눅 들지 않고 제 공을 던질 수 있습니다. 형편없는 공이겠지만요. 결과와 별개로 제 멘탈은 털리지 않을 테니까요. 


그랬는데, 나름 자부심(?)도 가질 정도로 나는 좀처럼 당황하거나 격렬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젯밤 나는 산산이 무너졌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너무나 무서웠다. 


저녁으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맥주 한 캔과 함께 먹었다. 자가격리자 어플에 상태를 입력하기 위해 체온계를 입에 물었다. 자가격리자들에 나눠주는 종이 체온계로 100번 정도 쓸 수 있다고 했다. 0.1도마다 검은색 점이 하나씩 박혀있는데, 1분 정도 물고 있으면 내 체온에 해당하는 온도까지 점이 녹색으로 변하는 체온계였다. 이게 과연 정확한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뭐 지금까지는 37.5도를 넘지 않으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체온계의 녹색점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37.7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입국해서 받은 검사에서 음성 판정 나왔는데. 이제 자가격리 기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에 발열감이라고는 없는데. 몸이 약간 더운 감이 있었지만 그건 내 몸의 온도보다는 날씨가 더워서 몸이 더워진 느낌이었다. 


'에이, 이 체온계가 오작동한 거일 거야. 지금까지도 37.3도 나온 적도 있지만 멀쩡하잖아. 조금 이따가 다시 재보자.'


체온계를 다시 사용하는데 필요한 시간 5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내 체온이 체온계에 남아있을까 봐 5분이 지나서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다시 입에 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체온 측정을 위한 60초를 버텼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입에서 체온계를 꺼내서 봤다. 


37.7도


이럴 리 없어. 이럴 수 없어. 자가격리 정말 성실하게 지켰는데, 현관문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갔는데. 정부의 방역 지침에 적극 협조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믿을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반응했다. 발열감이라고는 1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에 열이 나는 거 같았다. 두통기가 살짝 있는 것도 같았고, 목이 따끔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냐 이건, 그냥 불안하니까, 그래서 괜히 그런 느낌이 드는 거지 아무 일도 아냐. 머리로 다짐을 해봤지만 불안을 잠재울 순 없었다. 나는 이제 음압병실로 가는 건가. 가기 전에 뭐를 챙겨야 하나. 저녁 먹은 설거지를 안 했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후유증이 심각한 사람도 있다던데 나는 어쩌나. 내가 확진자면 미국에서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같이 미국에 갔던 엄마는 어떡하나. 사촌들과 아이들은 어떡하나. 몰려드는 걱정을 애써 털어내며 


몸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낮춰보려고, 0.2도만 낮추면 되는 거니까, 찬물로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인간은 변온동물이 아니라 이런다고 체온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간절하면 뭐라도 이뤄질 것만 같았다. 혹 정말로 내 체온 때문이 아니라 더운 날씨 때문에 몸이 덥혀져 있는 거라면 그건 낮출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에어컨 바람으로 몸의 더운감을 제거한 뒤 다시 체온을 재봤다. 


37.3도


너무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아직 방심할 수 없었다. 정말로 체온이 내려간 건지, 아니면 체온계가 오작동 한 건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또다시 초조한 마음으로, 그렇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더 희망찬 초조함 속에서 5분을 기다렸다가 다시 체온을 쟀다. 


36.5도


아...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체온이 더 내려갔다는 것에도 안도했고, 교과서에서 인간의 체온이라고 배우는 36.5도 그 숫자가 주는 안도감이란. 36.5라는 숫자가 이렇게나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숫자였던가. 그래서 한 해가 365일인가. 마음이 안정을 찾으니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문득 싱크대에 한가득 쌓여있는 설거지가 떠올랐다. 아직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설거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음이 안정되었다. 싱크대 수돗물 소리가 재즈 연주처럼 느껴졌다. 






격리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거 같다. 


슬기로운 감빵생활 찍던 시절이 떠올랐다. 의논할 사람도, 물어볼 사람도 없을 때 인간은 누구나 위축되고, 위축된 마음은 평소와는 다른 생각의 패턴으로 흐른다.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기 쉽다. 그런 잘못된 생각의 흐름을 잡아줄 사람이 없으니,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굴리다 보면 어느새 생각은 확신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감정 또한 그렇다. 평소라면 여러 감정이 뒤섞이면서 어느 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상황조차도, 격리되어 있다면 양상이 다르다. 이때 격리는 물리적인 격리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격리일 수도 있다. 격리된 사람의 감정은 다른 이들의 감정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섞임이 없다. 그나마 대면하는 감정은 SNS에 올라온 글을 통해서 만나는 감정들인데, 그다지 건강한 감정들이 아니다. 내 감정의 안 좋은 면만을 오히려 증폭시키기도 한다. 


생각이든 감정이든 격리 중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잡아줄 사람이 곁에 없다. 물론 없진 않지만 격리의 특성상 항시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나야 할 때도 만날 수가 없으니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감정을 증폭시켜 간다. 감옥에서는 그래서 생각이든 감정이든 느리게 진행되는 것을 연습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편지를 썼다. 답장이 올 때까지 아주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감정을 느꼈다. 친구들의 답장이 오면 내 생각과 감정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가격리, 이제 50시간 남았다. 원래 감옥에서도 출소 한 달 전이 가장 힘들었다. 시간은 더디 가고 긴장은 풀리고. 지금이 딱 그럴 때인 거 같다. 그래도 50시간 밖에 안 되니까. 잘 견딜 수 있다. 왕좌의게임이나 다시 정주행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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