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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16. 2020

판검사들이 피고인을 찾아가 재판을 한다면?

재판 방청 후기 

의사 파업과 의대생들 국가고시 거부 때 사람들은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고 수술도 잘하고 환자 배려까지 뛰어난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익준 교수는 정녕 드라마에만 있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에 찌든 이들이 의사들만은 아니다. 이과에서 전교 1등이 의대에 간다면 문과에서 전교 1등은 법대에 간다. 예컨대 감정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조직에서 왕따가 되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자기 상사의 비리를 파 해치는 비밀의 숲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도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판검사들은 대체로 목이 뻣뻣했고 태도가 굉장히 젠틀한 경우조차도 재판 과정과 결과가 피고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몰랐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분짜리 재판


10월 15일 2시 30분에 서울 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예비군 거부자 김형수의 재판은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판사는 학생생활기록부를 제출했는지 피고인에게 물은 다음 검사에게 학생생활기록부를 살펴봤냐고 물었지만 검사는 보지 않았고 보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판사는 검사에게 구형을 지시했고 검사는 항소를 기각해달라고 구형했다. 실형을 선고했던 1심 판결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건데,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더 이상 병역거부가 죄가 아니라는 점과 대체복무제가 이미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과연 고려되었는지 의문이었지만 이 글에서는 구형의 내용은 따지지 않으려 한다. 이어 판사는 김형수에게 최후진술을 하라고 했다. 재판이 이리도 허무하게 끝날 줄 미처 몰랐던 김형수는 최후진술을 준비하지 않았고 결국 간단한 대답만을 남긴 채 최후진술을 제대로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재판을 끝나고 법정에 나서는 시간이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럴 거면 피고인을 뭐하러 출석시키나, 자기들끼리 하거나 줌으로 재판해도 될 일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3분도 채 안 걸린 재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찍은 사진. 김형수씨는 이날 3분짜리 재판을 참석하기 위해 연차 휴가를 냈다. 

    

김형수의 판검사만 이러는 게 아니다. 같은 날 의정부지법에는 병역거부자 시우의 재판이 열렸다. 지난 재판이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증인 심문만 하고 피고인 심문은 다시 잡았다. 이날 재판에서 변호인이 먼저 피고인 심문을 했는데, 검사는 다음 기일에 하겠다고 해서 재판이 한 번 더 잡혔다. 원래는 하루에 진행할 수 있는 심문을 세 차례에 나눠서 하게 된 것인데, 여기에 피고인의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로지 판검사의 사정만을 살핀 결정이었다.       


재판을 한 번 출석하기 위해 피고인이 감당해야 할 일상이 무엇인지 판검사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직장인이라면 휴가 한 번 쓰는 게 얼마나 난감한 일인지, 휴가를 쓰더라도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기 위해 재판 며칠 전부터 바지런을 떨어야 하는지, 그런 상황에서 재판에 출석했는데 변호사가 없다는 이유로 변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거나 행정적인 문제로 재판이 그냥 다음 기일로 연기되어 버린다면 어떨지 과연 판검사들은 알까? 자영업자라면 재판 한번 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금전적인 손해가 얼마인지, 그 손해가 그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판검사들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나 할까?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받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의 소모까지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삶을 이해한다면 다른 접근, 다른 결론이 가능하다


물론 판검사 중에도, 의사 중에도 훌륭한 분들은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왕진 가방 속 페미니즘』을 쓴 추혜인 선생님 같은 분들처럼 말이다. 추혜인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즘 세상에 왕진을 다니는 흔하지 않은 의사다.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다니면 진료실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환자들이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지, 집까지 가는 길에 싱싱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구할 곳이 마땅히 있는지를 볼 수 있다.(『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28쪽) 예컨대 진료실에서는 환자의 질병을 보지만 왕진을 다니면서는 환자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을 본다면, 질병의 원인을 찾고 가장 적절한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날마다 10시간씩 일해야 하는 달동네 주민에게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드셔서 비타민을 섭취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처럼 틀린 거 하나 없지만 아무 짝에 쓸데없는 처방을 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문득 왕진 다니는 의사들처럼 판검사들도 피고인이 일하는 곳, 사는 곳에 와서 재판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법원에서 피고인들의 집과 직장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재판 한 번 받으려면 어떤 길을 와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피고인이 사는 집을 방문해본다면, 그가 왜 돈 몇 천원도 안 되는 라면 몇 개를 절도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폭언을 하며 해고를 한 사장을 분에 못 이겨 폭행한 노동자의 일터에서 재판을 한다면 노동자가 평소에 처한 노동환경이 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피고인의 삶을 이해한다면 절도에 대해, 폭행에 대해 죗값을 묻는다고 하더라도 좀 다르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들의 행위에 원인을 제공한 또 다른 죄인들에게도 죗값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피고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꼭 그들의 일터와 집에 가보는 것만은 아닐 거다. 판검사들이 피고인의 직장과 집을 방문해서 재판을 하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판검사들이 피고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재판의 과정과 결과가 피고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관심 갖지 않고 진행하는 재판이야 말로 삶의 리얼리티와는 괴리된  재판이 아닐까. 재판이 가져야 할 현실성은 행정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재판 내용에서 피고인들의 삶의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오마이뉴스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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