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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29. 2020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짧은 리뷰

주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고아성은 '떨리는 가슴', 이솜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박혜수는 '청춘시대' 때부터 좋아했다. 운 좋게도 배우들의 비교적 초창기부터 관심 있게 지켜본 셈이다. 그런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이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꼭 보고 싶은 영화였다.  


영화 줄거리는 익히 알려져 있는 대로다. 1995년 굴지의 대기업 삼진그룹에 다니는 고졸 여직원들이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된다. 공장 폐수를 무단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는데, 회사는 이를 은폐하려 들고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선악 구도나 갈등 구조가 아주 평면적이지는 않은데, 그건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서가 아니다. 나쁜 놈들이 다양하게 나오기 때문이고, 주인공들이 목격한 폐수 방출과 은폐도 실은 한 꺼풀 비밀이 더 숨겨져 있다. 한 문장으로 영화를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족벌 세습하고 페놀 방류하는 신토불이 나쁜 놈과 구조조정해서 회사 팔아넘기고 먹튀 하는 투기 자본 나쁜 놈 사이에서 새우등 터져가며 자신의 일자리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고졸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영화의 장점은 역시 팬심 가득 담아 주연 배우들이다. 대학교 때 프랑소와 오종의 '8명의 여인들'을 봤을 때의 기분 좋은 이질감이 떠오른다. 남자 배우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 영화였는데, 그래서 이상하면서도 무척 재밌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에서 젊은 여성 배우 3명이 주연을 하는 영화는 무척 기분 좋은 낯설음이다. 또한 '여성'과 '노동'이 교차하는 지점을 잘 보여주는데 '유머'까지 담고 있다. 주인공들은 모두 20대를 회사에 바쳤지만, 상고 출신이라서 대리로 승진도 못하고 커피 심부름에 청소와 같은 온갖 잡무만 도맡아 한다. 대학 나온 직원들, 남자 직원들보다 능력이 좋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곳이 없다. 잼의 '난 멈추지 않는다' 같은 노래, 주인공들의 옷차림,  뭔지도 모른 채 노래 불렀던 '세계화' 등 영화의 배경인 1995년에 대한 디테일을 잘 살려 놓은 것도 깨알 같은 재미다. 


반면 판타지가 과한 점은 아쉬웠다. 해피엔딩을 위해 어느 정도 판타지가 섞이는 건 괜찮다. 예를 들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화는 대놓고 판타지였지만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판타지가 아쉬웠던 것은 현실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원래 사람들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옛이야기도 보면 토끼가 호랑이 골려 먹는다. 그러니 상고 나온 여직원들이 다른 직원들의 연대 투쟁으로 나쁜 놈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충분한 미덕이 된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내가 과한 판타지라고 느낀 이유는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결과 때문이 아니라, 승리로 가는 과정 때문이다. 싸워서 이기는 데 꼭 필요한 요소가 삭제되어 있다. 이건 이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다루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동조합 같은 조직이나 활동가들이 나오지 않고 문제가 해결이 된다. 


말단 노동자들이 회사와 싸워 이기려면 백이면 백 노동조합이든, 노동운동 단체든, 진보정당이든, 인권단체라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세상이 저절로 변하거나 영웅적인 개인 몇 명의 활약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지만, 변화의 이면을 뜯어보면 그 변화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활동가들이 있다. 몰래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소셜미디어에서 널리 퍼져 사회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사회 변화는 뚝딱 일어나지 않는다. 1950년 미국 민권운동은 우연히 로자 파크스가 백인 좌석에 앉아서 시작된 게 아니다. 흑인 민권을 위해 무엇을 할지 수없이 토론하고, 토론 결과로 채택된 방법을 연습하며, 직접행동을 함께 할 사람을 모으고, 직접행동을 널리 알려내는 일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고 로자 파크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우연도 준비가 없다면 사건이 되지 않는 법이다. 


노동조합을 삭제한 채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것도 싸워 이기는 해피엔딩의 투쟁을 그리려다 보니 판타지가 과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다큐가 아닌 이상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가들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과감한 각색이나 단순화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전부를 삭제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에, 노동자들의 싸움에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크다. 그런데 그 노동조합을 등장시키지 않으려니 무리하게 사건이 전개되고 판타지가 과하다는 느낌을 준 게 아닐까 싶다. 노동조합이나 활동가들이 등장하면서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 같은 영화처럼. 노동조합이 등장한 채로 이 영화의 유머러스한 톤과 컴셉을 유지했다면 이야기가 훨씬 더짜임새 있지 않았을까. 


어쩌다 보니 아쉬운 점을 길게 썼지만 재밌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아성, 이솜, 박혜수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배우들 만으로도 충분한 영화다. 


조선희 작가의 소설 <세 여자>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고아성, 이솜, 박혜수 이 세 명이 주인공이 되어도 좋겠다. 고아성이 주세죽, 이솜이 허정숙, 박혜수가 고명자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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