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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Nov 08.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보다 더 재밌는 진짜 의사 이야기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서평


'하얀거탑' 이후 병원이 주무대가 되고 의사가 주인공인 작품은 잘 안 봤다. 10억을 들였다는 근사한 수술실 세트장과 장준혁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만으로도 '하얀거탑'은 내 인생의 드라마로 손에 꼽힐 만했으니. 그러다 최근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봤다. 제작진의 전작인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재밌게 봤고 좋아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배우들이 여럿 나왔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 모두 굴지의 대학병원이 무대인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하얀거탑'이 큰 대학병원 의사들의 현실을 극단으로 몰고 간 지점에 있다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현실을 아예 삭제해버린 아름다운 판타지였다.


친구가 책을 선물해 줘 읽은『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드라마가 보여 주지 못한 진짜 의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니 의사가 쓴 책이지만 의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료 현장의 이야기다. 이 현장에서 마주하는 의사, 간호사, 병원 직원, 환자, 환자의 보호자, 지역 주민들 모두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떤 것들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 안 되는) 사건들-갈등, 각종 폭력(성폭력, 가정폭력), 차별과 편견, 배려, 오해,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돌봄이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사건을 접하는 추혜인 선생님(저자)의 희로애락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성정체성, 계급격차, 사회 인프라, 의료 정책, 의료산업에 대한 불신과 같은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들이지만 의사와 환자의 일상적인 만남과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속에서 의학 정보와 사회학적인 지식을 이야기하니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코딱지를 먹는 행동이 면역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황당하고 재밌는 정보들과 과호흡이나 두통에 대한 손쉬운 대처법 같은 실용적인 정보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과호흡일 때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도 천천히 뱉으면 좋다고 한다. 모니터와 서류를 들여다보는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 목 스트레칭만 자주 해도 두통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책 직접 읽어보기. 정말 알기 쉽게 이해가 쏙쏙 되도록 설명해주신다.)


또 한 가지 장점은 솔직하고 담백한 문장에 있다. 추혜인 선생님은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꿈꾸지만, 폭력의 가해자가 환자로 오는 경우 "솔직하게는 그를 진료하기 싫었"(110쪽)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다고 의사 윤리에 어긋나거나 감정에 치우쳐 환자를 돌보지 않느냐 하면 오히려 반대다. 추혜인 선생님은 환자의 질병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삶에 집중한다. 암세포와 싸우는 게 아니라 환자와 대화한다. 환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고 소통한다. 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힘을 함께 만들어간다. 그러니 동네방네 명의라고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다. 트랜스젠더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동네 병원, 따릉이를 타고 병원에 올 처지가 안 되는 환자들을 찾아다니는 동네 주치의. 사실 우리 모두가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의사 선생님 아닌가.


책을 읽다 보면 동네 주치의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왕진을 가게 되면 무릎이 아픈 환자가 집에서 병원에 오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영양이 부실한 환자 집 근처에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살 곳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환자의 질병만 보는 게 아니라 삶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치료만큼 중요한 건 예방이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동네를 만드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는 추혜인 선생님이 이런 명의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큐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은 "지금 여기에서 누가 배제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시선이라고 말한다. 추헤인 선생님과 살림의료생협의 동료들 또한 의료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면밀히 살펴 그 사람을 돌보고, 그 사람 배제되는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 터를 잡아 의료협동조합을 만들고, 왕진을 다니며, 모두에게 열려있는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리라.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살림의료 생협과 추혜인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 곳곳에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페미니스트 경찰, 페미니스트 운동선수, 페미니스트 환경미화원, 페미니스트 운전기사 들은 세상을 또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 갈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된다. 문득 페미니스트 수사 경찰이 되는 꿈을 실현해가려 애쓰는 친구가 떠올랐다. 응원의 문자라도 한 통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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