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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층의 다이닝룸으로 갔다.
사각 테이블 여러 개가 합쳐진 거대한 테이블이 정중앙에 있었다. 다이닝룸은 일상적으로 식사를 하거나 TV를 보기도 하고, 공부하거나 파티를 하는 등의 커뮤니티 공간의 기능을 함께 하는 곳이었다.
한쪽 벽에는 용량이 적고 높이와 색상이 다른 오래된 냉장고 6대가 병풍처럼 나란히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거실 마루에 있었던 냉장고가 생각났다. 4명이 냉장고 한 대를 한 칸씩 나눠서 사용했다. 나도 작은 냉장고의 한 칸을 배정받았다.
주방에는 한쪽 벽면에 딱 맞게 나무로 짜 놓은 수납장이 있었고 수납장도 각자 한 칸씩 나눠서 사용했다. 30명 정도의 물건이 천장만큼 높은 수납장에 꽉 채워져 있어 엄청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수납장에도 이전 누군가가 사용했던 중고 프라이팬 한 개와 접시, 수저, 포크 등이 내 몫으로 놓여 있었다. 집주인이 신경 써서 챙겨둔 것이라기보다는 놓고 간 사람들의 물건을 그대로 받아서 사용하는 분위기였다.
부엌에는 고물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뚜껑 꼭지가 떨어져 나가고 원래의 외관을 알아볼 수도 없는 허름한 주전자가 있다. 여기저기 녹슨 상태 때문에 위생이 신경 쓰일 법도 할 텐데. 이곳의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잘 사용했다.
처음 봤을 때는 새 주전자가 얼마나 한다고 저런 골동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까 의아했는데, 파크사이드 하우스의 일원으로서 오래 살다 보니 왜 아무도 깨끗한 새 주전자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매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편하고 정든 물건이었다. 이제 골동품 주전자는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앞으로도, 주전자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누군가가 실수로 버리지 않는 한 계속 사용될 것이다. 낡은 토스터도, 전기밥통도 냉장고와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 곳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물건에 대한 집착이 거의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기부했다. 모두가 알아서 나누어 쓰고 바꿔 쓰고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이곳의 대부분의 물건은 자기 수명을 다할 때까지 본연의 역할을 다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방이 전부 다이닝룸 같지는 않았다. 자기만의 개성으로 꾸민 방을 구경 다니면서 업사이클링의 진수를 느꼈다. 멀쩡한 물건도 쉽게 버려지곤 하는 물질 만능주의의 세상에서 환경도 보호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일본에는 깨진 그릇을 수선해서 다시 사용하는 ‘킨츠기’(金継ぎ)라는 기술이 있다. 물건의 사용으로 인한 닳은 흔적을 중요시하고, 흠이 있거나 불완전한 것을 포용하는 킨츠기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와비사비'의 정신을 같이 이야기하곤 한다. 낭비하지 않고 부족한 대로 그 자체를 즐기며 사는 와비사비의 일본 철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집주인이 ‘와비사비’의 철학으로 게스트 하우스를 경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편에 가까웠는데 와비사비의 정신과 구두쇠 정신의 중간 어디쯤에서, 중고 제품과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을 재활용하며 알짜배기 경영을 했다.
다이닝룸의 책장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책들이 있었다. 모두 영어나 다른 나라 언어의 책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나도 한글책을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와비사비 侘び寂び(わびさび): 일본의 미의식 중 하나로, 소박하고 차분한 것을 기조로 함. 인생사의 무상함을 아름답게 느끼는 미의식. 원래 侘(わび)와 寂(さび)는 다른 개념이지만, 현대에서는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