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ill Light Aug 29. 2022

오렌지 주스 도둑

3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일 먼저 친해진 친구가 미국인 필이다.

어느 날 다이닝룸에 들어 선 순간, 냉장고 문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대용량 주스를 마시고 있는 남자를 목격했다. 그 사람이 마시고 있던 주스는 내 오렌지 주스였다. 그가 내 주스에 직접 입을 대고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같은 냉장고를 나눠 쓰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보자, 그도 눈치를 채고 황급히 마시던 주스를 냉장고에 넣었다. 불쾌했지만 이 상황에서 적당하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별말 없이 식사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조금 전, 그 남자도 옆자리에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운동을 많이 한 근육질 체격이고 라틴계처럼 보였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고 필 로드리게스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영어와 스페인어와 일본어가 능통했고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게스트 하우스에 오고 나서 며칠 동안, 다이닝룸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가볍게 영어로 인사 정도의 대화는 나눴지만, 그 이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고, 그들 대부분은 일본어를 전혀 못 했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면 나만 못 알아듣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소외감도 느꼈다. 일본에 와서 영어 때문에 고민하게 될 줄 몰랐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조급한 마음에, 공부하던 일본어 책을 덮고 다시 영어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일본어로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다. 


필은 일본어가 능숙하기도 했지만, 수다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평소 궁금했던 게스트 하우스와 일본 생활에 대해서 자주 얘기를 해줬다. 그 이후로도 식당에서 만날 때마다 잠깐씩 자잘한 수다를 떨곤 했다.

그는 핼러윈 데이에는 마법사로 분장하고 나타났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이닝룸에 조그만 트리를 가지고 와서 장식했다. 격투기 선수 같은 몸으로 아이처럼 해맑게 놀았다.


그날 필과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불쾌한 기분으로 말없이 지나쳤다면, 나는 아마도 필을 허락도 없이 남의 주스를 함부로 마시는 마초로 기억했을 것이다. 알고 나니 평소에 남의 음식을 함부로 먹는 사람도 아니었고 마초도 아니었다. 

겪어봐야 아는 사람이 있다.

이전 03화 와비사비(侘び寂び) 라이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