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ill Light Aug 29. 2022

게시판

6


                                                       

여러분! 밤에 방문을 꼭 걸어 잠그도록 해!
내가 몽유병에 걸린 것 같아.

                                                               (게시판의 글)



1층과 2층 사이 계단 중간쯤에 화이트보드 게시판이 있었다. 

게시판을 보면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다. 일종의 단톡방 같은 역할을 했다. 

오다가다 읽는 게시판이 너무 재밌어서 게시판 확인은 중요한 나의 일과가 되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새로운 소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게시판 글은 게스트 하우스 친구들이 고국으로 떠나면서 남기고 간 마지막 인사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떠난 친구들이 정성껏 남기고 간 글을 읽고 마음 따뜻해지는 날이 많았다.


너희들과 함께 살고 함께 놀아서 환상적이었어. 이 모든 행복한 순간들에 감사해. 언제나 행운과 행복이 함께 하길. 그리고 프랑스에 들를 때 꼭 보자.
우리 프랑스 와인을 취할 때까지 마시자! 
One Love.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글은 차츰 다른 글로 지워졌다.

도미니크의 송별회 8월 13일 토요일…

다다미 매트=각각 100엔, 8인치 TV=2,000엔, 펭귄 풍선=무료…

파크 사이드 영화 오늘 밤 23:00…

게시판 그림 낙서


하우스 친구들이 공원에서 모여 즉흥 콘서트를 하거나 벚꽃놀이 같은 이벤트가 열릴 때도 어김없이 알림이 떴다. 알림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고 주말에는 클럽에서 DJ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자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게시판에 알렸다. 때때로 재주 많은 친구가 만화도 그렸는데, 내용이 너무 재밌어서 오늘의 유머처럼 웃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월말이 되면 집주인 아저씨의 공지가 붙었다.

주로 집세나 전기세에 관한 공지였는데, 집주인은 굳이 전기 사용량 순서로 1등부터 꼴등까지 내림차순으로 이름을 써 붙였다. 온돌방이 없는 일본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아껴 쓰려고 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만 되면 나와 뉴질랜드에서 온 아저씨가 둘이서 번갈아 가며 일등을 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선납으로 모두가 같은 날짜에 집세를 냈다. 집주인은 전기세 요금 명단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된 집세 명단도 붙여놓곤 했는데, 일단 집세 명단이 붙으면 하루빨리 내는 편이 좋았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정해진 날짜보다 늦으면 집세를 내지 않은 사람 이름에 잘 보이도록 빨간 동그라미를 표시해서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했다. 무언의 압박은 효과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 크리스와 로버트의 이름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