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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현 Dec 27. 2020

빨리빨리의 시대에 천천히 읽기

슬로우 리딩 클럽의 시작과 변화

한국인은 빨리빨리! 인터넷도 택배도 초고속인 한국에서 살면서 여유를 가지기란 참 어렵다. 오죽하면 자판기에서 종이컵이 나오기도 전에 손을 넣고 기다리면 한국 사람이라는 농담도 있을까. 사회적인 분위기가 무엇이든지 빠르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성향을 더 가속화한다. 이제는 오전에 주문한 택배가 오후에 도착 문자가 오지 않으면 중간에 잘못되었나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모든 것이 빨라져서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 관공서 업무도, 은행 업무도, 택배도, 인터넷도 빨라지니 초조하게 일이 처리되는 것을 기다리는 일은 없다. 하지만 모든 일이 빨라지니 우리 마음에서 여유와 너그러움도 사라지고 있지 않나 문득 걱정이 된다. 패션도, 노래도, 인기 있는 가수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유튜버도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을 낮춰도 트렌드에 뒤처지는 사람이 되기 일쑤다. 회사나 학교에서도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트렌디함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아침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면서도 이 옷이 지금 입어도 유행에 뒤처지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고, 종종 대중교통에서 나와 같은 옷이나 신발을 착용한 사람들을 보고 부끄러웠던 경험이 SNS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 사회에 속해 있을 때는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항상 따라잡으며 헐떡이면서도 흐름을 거스르거나 흐름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1년 반 동안 지내면서 마음을 많이 비우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학교를 다니면서 공모전과 대학생 마케터를 병행하고,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음 학기를 위한 공부를 하며 숨 가쁘게 살았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한 기업에서 주최한 서바이벌 마케팅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방학 때는 인턴십까지 병행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낸 후에 친구가 ‘이 노래 작년에 우리가 많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잘 듣고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노래도, 친구와 함께 그 노래를 많이 들었던 기억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한국에서 도망을 가려고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미국에 가서 아예 그곳에서 정착하고 여유롭게 하루를 즐기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미국 땅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채소와 과일을 갈아서 마시고, 달걀을 삶아서 먹고 맨 얼굴에 선크림만 바르고 통근 버스를 탄다. 버스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천천히 출근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을만하면 맛있는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커피를 사 와서 마시며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5시 정각에 퇴근을 한다. 집까지 1시간 정도 걸어서 퇴근하며 샌프란시스코의 수많은 언덕과 바다를 눈에 담고, 발로 걸어 마음에 사진을 찍는다. 집에 와서는 천천히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책이나 영화를 보다 잠자리에 든다. 이런 여유 있는 매일을 보내면서 한국에서, 특히 마케팅을 전공하고 일하면서 생긴 트렌드에 대한 강박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햇빛 아래서는 덥고, 그늘에서는 추운 샌프란시스코의 날씨에 거리에는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부터 패딩 점퍼에 어그부츠를 신은 사람까지 패션이 천차만별이었고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트렌디하지 않지만 트렌드를 앞서서 마케팅 기획을 해야 했던 내게는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얼음이 되어있던 내게 “트렌디하지 않아도 돼!”라고 누군가가 얼음이 된 내게 땡을 외쳐준 것 같았다. 


오히려 트렌드에 민감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연연하지 않으니 거꾸로 트렌드를 읽을 줄 알게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절에 책도 읽지 않고 일기조차도 쓰지 않고 마음껏 놀았기에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글을 쓰고, 결과물을 만들며 표현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해야 했지만 그 공백이 내겐 큰 힘과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사회생활에서의 약자들, 이 빠른 흐름에 나를 맡긴 채 ‘나’를 잃어가기 싫은 사람들, 트렌디함보다는 나다운 것을 찾고 싶은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도 조금이지만 그런 욕구를 표현하고, 목소리를 내는 데 조금은 일조했다 싶어 스스로가 대견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서도 우리 각자의 모습을 잃지 말자며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시작된 ‘슬로우 리딩 클럽’을 우리는 서울에서 열어보자며 당차게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 슬로우 리딩 운동을 처음 시작한 분과 연락하며 모임의 취지와 방향성을 듣고, 우리는 서울에서 해보겠다고 이야기해서 승인을 얻었다. 로고와 여러 공식 자료를 받아서 친구들과 함께 빨리빨리 흐름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느린 삶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한참을 즐겁게 달렸다.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SNS에서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면 준비는 끝이었다. 같은 시간에 모여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온 책을 읽는다. 뉴질랜드에서는 각자 책을 읽고 헤어지는데 우리는 힐링을 위해 책 읽는 시간이 끝나면 책 읽으며 느낀 것들을 이야기 나눴다.




핸드폰도 끄고 한 시간을 책에 푹 빠져서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구절은 필사하고 느낀 점은 노트에 정리를 하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2년 정도 슬로우 리딩 클럽에서 마음을 살피고 서로의 마음을 살려주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빨리빨리 흘러가는 트렌드와 때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가 정리되었다. 마음을 챙기는 슬로우 리딩을 하면서 마음 근육이 단련되었고,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도 중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분야와 위치에서 맡은 바 일을 잘하면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서 슬로우 리딩 클럽 멤버들은 지금 각자의 꿈을 이루고, 꿈을 위한 준비를 하며 각자의 속도대로 삶을 가꾸고 있다. 빠른 사회에서 천천히 읽으면서 나의 속도를 찾고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내년에는 새벽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새벽에 기상해 슬로우 리딩을 이어가기로 했다. 얼굴을 대면하지 못해도 천천히 나만의 속도와 삶을 찾아가기 위해 천천히 읽는 슬로우 리딩 클럽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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