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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May 02. 2019

취향 남용의 시대  

나만의 취향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취향에 대하여 

취향(趣向 Taste)이라는 단어를 놓고 종종 묵상을 하곤 합니다. 한자인 趣 를 풀어보면, 달려가서라도 가지려고 하는 것, 가질 때의 맛이 너무나 달콤해서 좋은 미칠 지경인, 사죽을 못쓰는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미학에서는 취미라는 말로 바꿔 썼지요. 맛을 향해 달려가는 행위를 표현한 것입니다. 좁게는 미각, 맛에 대한 판정을 뜻했지만 뒤로 가면서 미적 대상을 대상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판정할 수 있는 능력이란 뜻을 갖게 된 단어입니다. 취향이란 단어만큼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핫한 문화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우리가 찾는 답의 일부

덴마크 알보그 미술관에서, 작년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진행된 <좋은 취향의 지표>란 전시를 운 좋게 볼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프랑스의 입체파 미술을 덴마크에 소개한 빌헬름 룬트스트룀의 회화, 그의 예술적 영감을 건축과 가구, 조명에 적용했던 핀 율과 루이스 폴젠을 묶어 소개한 전시였습니다. 사실 이 전시의 원래 제목은 <Epitome of Good Taste : 좋은 취향의 전형>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전시를 통해 느꼈던 것을 써보려고 해요.



우리는 서로에게 취향의 문법을 배운다 

원래 이 전시는 북유럽 디자인의 중요한 DNA라 할 수 있는 균형과 단순미, 기능성의 미감의 뿌리를 밝혀보고자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빌헬름 룬트스트롬의 누드나 정물화는 입체파의 영향으로 매우 간결한 선과 형태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의 예술적 영향이 핀 율이나 폴젠같은 조명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주었다라는 취지의 전시인것이죠.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설명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서유럽의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모방했고, 영국은 오늘날의 벨기에를 많이 참조했죠. 


오늘날 북유럽 디자인의 핵심적 유전자에는 18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태어난 '비더마이어Biedermeier' 시대의 예술과 건축, 가구와 인테리어가 있습니다. 상호 주고받는 것이죠.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사용된  '전형'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 잉태된 문화가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만듭니다. 그 전형이란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대한 통찰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최근 북유럽을 핫하다고 느끼고, 혹은 몇 년 전에는 프렌치 스타일을 핫하다고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자의 흔적도 없이 트렌드가 사라져 가는 걸 보는 건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유럽은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다

유럽은 하나의 대륙으로 묶여있지만, 4개의 방향에 따라 각자가 너무나 판이한 미적 성향과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북유럽과 서유럽, 동유럽, 중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그들이 18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창조한 문화의 성격과 미감이 너무나 다름을 배웁니다. 각국은 자신이 지금껏 누적해온 문화적 역량을 '라이프스타일'이란 이름으로 팔고 있고, 우리는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트렌드'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에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전형이란 단어의 의미

이 과정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견고하게 설계되고 내면화된 라이프스타일이 '한 시즌'을 풍미하고 또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할 상품처럼 취급되지요. 전시 제목인 <전형 Epitome>이란 단어는 의외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16세기 초반, 이 단어는 저술의 주요 논점을 정리한 문장, 요약문이란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라틴어의 Epi는 ~의 내부란 뜻이고, 동사형인 Temnein은 '잘라낸다'란 뜻을 갖고 있어요. 결국 '생각의 정수를 밀도 있게 축약하기 위해 내부의 잔가지들을 다 쳐내는 것'이란 뜻이었지요. 북유럽 디자인의 핵심을 이 단어만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전형이란 '드러난 형상'이라기보다는 '과정의 치열함'을 뜻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잔가지를 쳐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그것은 선별의 문제이고, 어떤 것은 죽이고 남겨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죠. 우리가 가진 내적인 힘을 어디에 집중할 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문제입니다. 결국 선택을 통해 한 시대의 미적 전형을 만든다는 것은 강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북유럽의 미감을 깔끔한 유기적인 선과 절제된 장식을 이야기하지만, 절제와 생략을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무엇이고, 크리에이터에게도 이 문제가 얼마나 힘겹고 지난한 타협의 과정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유럽과 중부 유럽도 똑같이 이 과정을 거치며 시대별로 자신들만의 미감의 원칙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프렌치 모던 입네 하는 것도 전통과 현대를 잘 버무린 그들의 인테리어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잖아요.  



전형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형이란 결국 내부에서 치열하게 '한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타자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트렌드를 빨리 수용하고 맛보는 능력은 아주 뛰어납니다. 굉장한 장점이라면 장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팔아야 할 '라이프스타일과 취향, 미의 전형이 없습니다. 최근 구독 경제와 큐레이션이란 단어가 주류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가 불편합니다. 자기네가 수급하는 화가 포스터를 매달 보내주면 이게 큐레이션이고, 영화 몇 편 골라서 유명인의 소감 몇 마디 갖다 붙여서 상영하면 큐레이션인가요?  이렇게 추접스러울 정도로 맥락 없는 '큐레이션'이란 단어가 소비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타인의 취향을 내 것 인양 소비만 하다가 '나'를 만들 계기를 놓치고, '나'란 존재의 연속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합니다. 취향은 인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것이라는게 취미/향에 대한 학자들의 오랜 논쟁의 결말입니다. 정신물리학의 문을 열었던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페히너는 타인의 감화와 자기 성찰, 습관, 연습, 상상을 통해서 취향을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신적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매체의 광고와 1년마다 발행되는 트렌드 용어사전을 자기 복제하고 있진 않습니까? 북유럽을 배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디자인이 어떤 맥락 속에서 태어나고, 왜 그들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자랑스럽게 고수하는지, 이런 걸 알아야 그 속에서 디자인 양식의 핵심적인 문법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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