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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Jun 22. 2019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우산의 발명

프랑스의 우양산 장인 미셸 오르토의 <여름이 피다> 전 리뷰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글을 쓰는 밤늦은 시간, 저녁 즈음부터 어스레한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커피를 내리고 한 권의 책을 꺼냈습니다. 사선으로 미끄러지며 창의 표면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좋습니다. 제가 꺼낸 책은 마르탱 파주의 <비>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비에 대한 단상을 모은 책입니다. 어린 시절 비가 오면 참 좋아했더랬습니다. 하얀색 레인부츠를 신고,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꼬마 아이는 일부러 물 웅덩이가 생긴 도시의 패인 홈을 톰방 톰방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피에르 르누아르 <우산> 캔버스에 유채, 1881년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가 그린 <우산>을 한번 보세요. 갑작스레 내린 파리 한가운데, 여우비를 피해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짜증 섞인 표정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참 놀랍지요? 우산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 꽃을 파는 여인에게 은밀하게 말을 거는 남자와,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인지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 '저 남자 좀 보래요'라고 시선을 쏟아내는 소녀의 대비가 즐겁습니다. 


제임스 휘슬러 <파라솔을 든 여자> 1910, 종이에 수채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휘슬러가 수채화로 그려낸 여인이 든 양산을 한번 보세요. 정오를 넘어 직선으로 어루숭 쏟아지는 햇살을 피하느라, 그림 속 여인이 꺼내 든 양산의 손잡이와 핸들 부분은 청신한 초록빛을 띱니다. 저는 패션의 역사를 연구하는 큐레이터입니다. 미술사를 연구하는 분들 그림의 전반적인 표현방식이나 화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붓터치와 색감이 관심을 갖듯, 저는 그림 속 여인이 든 패션 소품인 양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양산은 그저 햇살을 막아주는 기능을 넘어, 17세기부터 여성/남성들의 빼놓을 수 없는 액세서리였으며, 놀랍게도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과 트렌드를 만드는데 한몫을 한 소품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우양산 장인, 미셸 오르토를 만나다


프랑스의 장식미술 박물관에 가면 프랑스에서 생산된 우양산을 연대별로 잘 볼 수 있지요.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기회를 갖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플랫폼 엘 컨템퍼러리 아트센터에서 역사적인 우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마음이 뛰었죠. 게다가 이번 전시에 협력 아티스트로 참여하신 사진영상작가 김용호 선생님이 직접 오라며 카톡을 주셨으니, 저야 한걸음에 달려갈 수밖에요. 가운데 있는 분이 미셸 오르토입니다. 30년 넘게 역사 속 우양산을 수집하고 원형을 복원해왔던 고집스러운 장인이시죠. 


현존하는 문화유산이라는 인증마크를 받았고, 2013년에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장인의 최고 영예인 Master of Arts를 받았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우/양산이란 소품은 얼마나 중요한 소품일까요? 지하철에서 놓고 내려도 다시 찾지 않는? 그런 소품인 듯 보이지만, 사실 양산은 고대 이집트부터 왕을 비롯한 최고위층의 권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물이었죠. 이 우산에 대해 잘 소개해 놓은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 문화사에 관한 깊이 있는 책을 많이 썼던 조앤 드잔이란 학자예요. 



이 분이 쓴 <The Essence of Style>이란 책에 보면 우산의 발명과 의의에 대한 항목이 있어요. 우리가 요즘 흔하게 쓰는 접이 우산은 루이 14세 때 태어났어요. 양산이 먼저 태어났고, 이후에 1677년 방수천 제조 기술이 완성되면서 우산이 나옵니다. 이 접이 우산을 만든 사람은 장 마리우스라는 당시 상류층 여성들을 위해 핸드백을 만들던 가방 장인이었습니다. 



핸드백을 들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방은 원래 여닫이 부분을 잘 만들어야 하거든요. 이 기술을 우산에 접목시킨 겁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육중했던 우산은 이때부터 가벼워졌죠. 루이 14세는 그 편리함에 감탄해서 무려 5년간 우산의 독점적인 생산권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우양산은 철저하게 수공예로 만들어진 탓에, 당대의 트렌드와 미감을 살리기 위해, 우산의 부속 요소인 핸들, 손잡이, 우산꼭지와 같은 부분들을 나무, 상아, 자수정과 같은 독특한 소재를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양산을 위해서는 다양한 패턴이 들어간 레이스를 써서 기품을 더했죠. 


그림 속 여인들처럼, 파라솔을 들고 

당시 여성들의 풍속화와 패션 일러스트를 보면, 다양한 우산들이 등장하는데요. 그 우산들을 찍어봤어요.


우산의 손잡이 부분을 어찌나 정교하게 조각했던지,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조각 부분이에요. 여기에 손잡이에 시계가 달려있거나, 중간의 핸들 부분에서 칼을 꺼낼 수 있도록 설계된 우양산도 있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볼 수 있으니 눈이 호강을 했지요. 



낭만주의의 시작, 우산의 발명


이 우산은 놀랍게도 그 기능을 넘어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비가 오는 시간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준 것이에요. 많은 분들은 네까짓 게 무슨 큰 일이냐며 물으시는데요. 그렇지가 않아요.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면서, 이전과는 항상 다른 차원의 깊이와 울림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진창을 걷기 싫어, 집안에만 틀어박혀있어야 했죠. 하지만 접이 우산과 함께 우리는 밖으로 나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빠질 수 있게 된 거예요. 



자연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게 된 거죠. 마르탱 파주의 책에 이런 문장이 있군요 "비가 내리면 우리는 발아한다. 비옥함은 정신의 한 자질이다. 새싹, 떡잎, 생각들이 자라난다. 우리는 그 과일들을 수확한다"라고요. 우리 인간은 도시란 메마른 공간 위에서 예의 촉촉함을 잊지 않으려 수액을 가진 다른 인간을 만나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산은 바로 이런 감성의 촉촉함을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에 심어놓은 사물이에요. 



7월이 다가옵니다. 곧 우기의 시작이지요. 요 며칠 파삭파삭한 날씨 때문에 많이 행복했는데, 이제 우산을 들 날이 많아지겠죠? 비는 그 자체로 부산함 속에서 부글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져다줍니다. 다가오는 우기의 시간, 미셸 오르토의 근사한 우산을 보며 영혼의 들판을 거닐어 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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