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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May 02. 2018

인생은 잘 짜인 한 벌의 스웨터

박재영의 그림을 읽는 시간 

안녕하세요 패션큐레이터 김홍기입니다. 패션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오랜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수많은 기관과 단체에 강연을 다녔고, 각종 기업 컨설팅과 개인 스타일링, 심지어는 퍼스널 쇼퍼를 하기도 했지요. 패션이란 영역에서 저는 제가 하는 업에 대해 오랫동안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이 질문은'나'라는 주체의 고유한 언어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내 생각의 얼개를 철저하게 다져간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밀도와, 구조를 해명할 언어의 온도를 함께 고려해야죠. 우리가 자신의 철학을 갖기 위해 전문적인 철학자의 생각과 방법론을 배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나란 존재에 앞서서, 내가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 이들입니다. 그들은 반성의 저울과 성찰의 나침반을 가지고 자신이 던진 질문의 풍경 속으로 치열하게 걸어 들어간 이들입니다. 


박재영 <Woolscape-Put Hand In> 캔버스에 유채, 2017년 


2008년에 <하하 미술관>이란 책을 썼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사회의 일상을 풀어냈지요. 이 책의 첫 장에 실린 작가가 바로 박재영이란 분입니다. 울 스웨터의 올을 어찌나 촘촘하게 그렸는지 그 섬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린 누적된 시간들을 머리 속으로 계산해 보곤 했는데, 한마디로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박재영 <Woolscape-Bashful> 캔버스에 유채, 2015년 


박재영의 그림 속에 묘사된 실의 올들을 보십시오. 서로가 고리의 몸을 만들고 연결하며 인간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올의 질서 정연한 배열 앞에서 숙연해졌습니다. 그는 2008년 제 책에서 소개를 한 이후로 너무나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바로 올해였습니다. 너무나도 중간의 휴지기가 길었죠.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워낙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라는 짧은 답변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Woolscape입니다. 울로 그린 풍경이란 뜻입니다. 저는 그의 그림 속 스웨터가 너무 좋았습니다. 실제로 스웨터를 입는 것도 좋아하죠. 오래된 스웨터는 약간 늘어지는 맛은 있을지 몰라도 따스함 공기를 품는 함기성은 더 좋아져서, 인간을 더 따스하게 안아줍니다. 스웨터를 입어본 본들은 아실까요? 인간의 체온으로 덮힌 따스한 공기가 몸의 구석구석을 순환하도록 외부의 아픔과 상처를 차단하는 것은 균일하게 배열된 올들의 힘인 것을 말입니다. 

박재영 <Woolscape-Gaze> 캔버스에 유채, 2016년 


실 Thread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패션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결국 우리가 입는 모든 옷은 저 실로부터 짜인 세계입니다. 실은 우리가 입는 모든 패션의 세계를 짓는 모성의 자궁과도 같습니다. 실 Thread란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면 정말 다채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꼬아서 만든 실이란 뜻 외에도, 인간의 생명이란 뜻도 있고, 이야기의 줄거리와 맥락이란 뜻도 있답니다. 한올 한올이 뭉쳐 그려낸 저 스웨터에는 그 옷을 입은 인간의 삶과 맥락,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재영 <Woolscape-Gaze> 캔버스에 유채, 2016년 


살아가며 때로는 삶이 삶의 실타래처럼 엉킬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풀어서 올의 고리를 만들어야만 새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의 그림 앞에서 아침마다 묵상하게 되는 이유예요. 그림 속 저 올들의 세계처럼, 누적의 시간을 조금씩 만들어가며 요즘은 제 자신에게 조금은 여유가 생겼어요. 이 브런치를 통해 커피 한잔으로 시작하는 아침의 여유에 따스함을 더하는 머그잔의 손잡이 홀더 같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가지런히 배열된 저 올들의 무늬를 보세요. 힘겹지만 하나하나 애를 쓰며 나아가는 저 실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상을 횡단하며 살아내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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