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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May 25. 2018

패션, 리버럴 아츠를 만나다

패션계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디자이너보다 디렉터가 필요한 세상

안녕하세요. 패션큐레이터 김홍기입니다. 오늘은 교육에 관한 생각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이틀 전 부산외국어대학교의 파이데이아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했습니다. 이곳은 리버럴 아츠를 공부하는 학생들이지요. 2년간 깊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은 후, 제2의 전공을 고르게 된다고 하네요. 최근 패션계를 비롯, 세계 유수의 디자인 학교들이 밀도 있는 자유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벌의 옷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디렉터 능력을 키우고 전체적인 상을 그릴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수석 디자이너가 아닌 수석 디렉터가 필요한 시대예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보세요. 과거와 달리 그들은 SNS에서 수많은 이슈거리를 찾아 옷으로 표현하고, 화두를 제시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읍니다. 심지어는 옷을 위해 글을 쓰고 필름을 만들기도 하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요구하는 조건의 깊이가 점점 더 커지는 사회입니다. F.I.T나 파슨즈 같은 세계적인 디자인 스쿨도 패션 전공자들에게 꽤 깊은 소양의 리버럴 아츠 교육을 요구합니다. 


리버럴 아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세계

리버럴 아츠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패션을 전공하는 이들이 리버럴 아츠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구성된 이원적 세계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날카로운 판단력을 벼리워서 내가 일하고 싶은 영역의 다른 밀도를, 그 속에 숨은 면모들을 읽어내야죠. 철학을 공부하는 것도 플라톤 같은 철학자 이름을 외우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그들이 생산해낸 텍스트를 읽는 과정에서, 그들의 사유의 방식이, 오늘날 결국 나 자신이 치열하게 풀어내고자 하는 문제 해결의 좋은 마중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타자들의 문화를 배우고, 다른 언어를 통해 모국어의 속살을 더욱 밀도 있게 알게 되고, 테크놀로지를 공부하면서, 현재의 패션 공부가 어떻게 기술적 진보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게 되니까요. 


패션 공부가  맨날 신작 런웨이만 유튜브에서 열심히 보고, 패션 컬렉션 정보 분석하고, 재단 배우고, 옷 그림 그리는 게 다가 아니잖습니까? 옷을 만드는 이들도 세상의 일원일 뿐이고,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의 운명입니다. 리버럴 아츠는 자유 교과입니다. 유연하고 비판적인 사고와 발상을 하는 인간은, 소통과 논의를 통해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교육이죠. 이런 리버럴 아츠에 패션계는 항상 목말라 있습니다. 한 시대의 디자인은 문제 해결을 넘어, 시대의 구성원이 믿고 있는 신화, 체계, 기술의 정당성에 질문을 던지고, 이를 재설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답을 낸다는 것은, 꼭 이전의 것을 폐기하거나 소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다른 좌표값을 내보는 것이죠. 


생각은 결국 옷이 된다 

사회 내부에서 변화를 겪고 있는 큰 문제(Big Issue)도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민거리를 통해 변화하는 인간의 태도는, 멘탈리티는 또 다른 옷 입기의 방식을, 대안적 소비문화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핵심이죠. 생각의 변화는 곧 우리의 외피인 옷을 구매하고 연출하는 스타일링의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 시대가 여성성을, 남성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가족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 아동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 이런 생각의 결 하나하나가 옷이란 사물의 세계 전체를 바꾸어버립니다. 남성복 레이블의 정체성이, 사회의 한 부분을 보는 입장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지요. 


패션은 결국 변화에 대한 철학을 구성해가는 하나의 방법론입니다. 변화에 대응하되, 개인 각각의 연출에 따른 상상력의 힘을 요구하죠. 그런데요, 이런 말 백날 해봐야 소용없는 게, 나 스스로 좌표값을 찾는 게 워낙 어렵다 보니 이미 '만들어진'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고, 또 여기에서 나온 일종의 규범, 캐논에 목을 매는 겁니다. 이 캐논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또 다른 장벽입니다. 오랜 세월 믿었고 이견없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그 생각을 지금 '이 순간'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풀어볼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이죠. 기존의 전제를, 생각이 잉태된 사회적 맥락을 파보려고 하지 않아요. 생각의 우물에 갇히는 것이죠. 


인간을 자유롭게 하라

리버럴 아츠는 바로 이런 정신의 장벽, 두려움에서 인간을 자유케 하는 생각의 총체인 거죠. 오늘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를 모델로 쓴 i-D 매거진 표지를 내건데는 이유가 있어요. 라거펠트는 패션 디자이너에만 국한되지 않죠. 다양한 영역에서 영감을 얻는 크리에이터이자,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굳어있는 성역할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죠. 최근 패션계에서 붉어진 미투 운동에 대해, 패션모델을 향해 혐오발언에 가까운 언사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 분을 마냥 칭찬만 할 수 없는 게, 세대론적인 한계를 넘어서 사회 공동체 내부에서 변화하는 빅 이슈들, 생각의 틀에서 그도 자유롭지 않았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디자이너들도 한쪽 눈을 가리게 만드는 사회라는 '안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안대를 벗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사유를 위한 모험을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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