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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기 Jun 16. 2018

옷장이란 무엇인가

<옷장 속 인문학>의 해외 콘텐츠 수출을 앞두고

옷장 속 인문학, 해외로 가다

안녕하세요.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입니다. 2016년 10월 <옷장 속 인문학>을 출간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기쁜 소식 하나 전해드릴게요. 출간 직후, 파죽지세로 6쇄를 넘었던 <옷장 속 인문학>이 해외 북 페어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항상 패션과 관련해 새로운 콘셉트의 책을 쓰는 게 목표였습니다. 패션 콘텐츠들을 인문학이란 거시적 렌즈에 맞추느라, 부족한 점도 많을 겁니다. 저로서는 아쉬운 책이었습니다. 제 책을 작업한 에디터가 출간 직후, 결혼과 함께 퇴사를 하는 바람에, 제 책을 관리해줄 주체가 붕 떠버렸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표지까지 비슷하게 만들어 미투 제품을 내놓아도, 분노를 삼켜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옷장 속 인문학>이 해외로 수출이 되었습니다. 홍콩과 싱가포르,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까지요. 아시아에서 한국의 콘텐츠들이 경쟁력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만에서 나오게 될 <옷장 속 인문학>의 표지를 봤습니다. 하긴 옷장이란 공간을 표현하다 보니, 디자인이 비슷하긴 합니다.


옷장, 인간의 정신을 조각하는 곳

저는 지금도 옷장이란 구체적 하드웨어에 우리가 무엇을 채워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옷장(Wardrobe)은 그저 옷을 보관하는 지성소를 넘어, 옷이라는 침묵의 언어를,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줄 섬세한 어휘가 숨 쉬는 곳이니까요. 최근에는 문학가, 화가, 디자이너, 무용가, 건축가 등 다양한 이들의 옷장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각 분야의 저명한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제게 공개해준 옷장 속엔 놀랍게도 예술가를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단서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유명인들을 넘어, 일반인들의 옷장도 살펴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항상 정중하게 이 부분을 부탁드리면,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옷장 설계를 주문하시는 분도 많았습니다. 옷장 속에서 제가 발견해낸 인간의 인상은 그저 한 순간을 명멸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옷은 인간의 무의식과 연결되어 삶의 많은 양상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패션을 인문학적으로 탐색한다는 것

우리는 옷을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면서도, 증거 없이 너무 주관적으로 담론을 만들어왔습니다. 옷장 속 인문학을 쓰면서 이 점에 주목해왔습니다. 책 출간 후, 방송 작가들을 비롯해서, 문학하시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호응을 얻었던 장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 패션 치료를 연결해 쓴 글이었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패션을 공부한 분은 패션의 인문학적 탐색을 복식 미학이라는 협소한 렌즈에 한정시킵니다. 그러니 정작 제 책에서 스프레차투라라는 일명 '무심한 듯 시크하게'의 뜻으로 풀 수 있는 단어의 역사와 어원 설명 같은 항목은 '좋았다' 하면서도 좀 더 다른 이질적 영역과 연결시켜 설명하면 이해를 잘 못해요. 놀라운 건 패션 이외의 영역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해를 하는 데, 정작 패션을 한답시고, 가르친답시고, 패션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답시고 말하는 이들이 더 이해를 못합니다. 스스로 성장의 좌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담론에 묻혀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패션계라고 다르지 않지요. 패션은 라이프스타일의 한 축일뿐입니다. 함께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주요한 축을 함께 사유해야만 옷에 대한 생각도 제대로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옷장 속 인문학>이 해외로 나갑니다. 사실 패션 외에도  인문학, 자연과학, 공학 모두 여전히 우리보다 앞선 지식의 체계와 논리를 가진 나라들이 패권을 쥐고 있죠. 오랜 세월 학자란 자들은 지식의 수입상으로 살아왔습니다. 이건 마냥 비난을 할 문제도 아니에요. 그만큼 우리가 실제로 뒤지고 있으니 따라잡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방대한 패션에 관한 담론이나 생각, 서구의 저명한 학자들이 쓴 글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논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역으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얘네도 한계가 있구나 하고요. 제가 패션전시와 큐레이팅에 힘을 바치는 이유입니다. 서구는 분명 우리보다 자신들의 '서양'을 설명해낼 많은 자료와 힘을 갖고 있죠. 그렇다고 역으로 꼭 서구의 반명제로서의 동양만, 한국만을 파야할까요? 오히려 타자의 눈으로 비판적으로 읽어볼 서구의 표정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콘텐츠도 이런 논리로 방법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옷장 속 인문학>의 2탄은 세계시장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 패션을 읽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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