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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13. 2023

바퀴벌레는 그냥 벌레가 아니라구요

2023_03. 영화 <조의 아파트>

1.

 영화 <조의 아파트> 단 한편에서 본 바퀴벌레 수가 살면서 평생 본 바퀴벌레 수 보다 많았다. 감히 말하건대, 이 영화의 모든 관객에게 통용되는 말일 것이다. 살면서 볼 수 있는 바퀴벌레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아마 이 영화의 관객들은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려 너에게 주어진 양을 한없이 초과했느냐"라는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히어로즈>의 등장인물 모힌더 수레쉬 박사는 바퀴벌레의 생존능력을 이야기하며 '신이 정말 자기 형상대로 창조해 냈다면 신은 바퀴벌레라고 해야겠군요' 따위의 농담을 했는데, <조의 아파트> 관객을 꾸짖고 지옥에 보내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아마 수레쉬 박사가 얘기한 바퀴벌레 형상의 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2.

 나는 관절이 인위적으로 꺾이는 것 같이 생긴 모든 벌레를 싫어한다. 그중 최악은 바퀴벌레다. 정확히 말해 '싫다'가 2할 정도라면 나머지 8할은 '무섭다'가 채우고 있다. 옆에만 있어도 소름 돋고, 내동 가만히 있다가 내쫓으려는 순간 '이때를 기다렸다, 가엾은 필멸자여'하며 푸드덕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겁하다가도 '나를 기만하는 건가' 싶어 그 작은 생명체의 지능을 더 높게 의심하곤 했다. '가엾은 필멸자'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난 진심으로 바퀴벌레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어떤 그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퀴벌레는 물론이고 모든 벌레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세상 모든 바퀴벌레가 똑같이 생겼으며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바퀴벌레는 단 한 마리이며, 그 바퀴벌레가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우연찮게 바퀴벌레를 발견하는 경우는 많지만 다시 찾으려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바퀴벌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이 외에도 인터넷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바퀴벌레의 특징들, 예컨대 머리가 잘려도 며칠은 산다더라, 먹이가 없어도 몇 주는 산다더라, 핵전쟁이 일어나도 살아남는다더라 등,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해 봤을 때, 수레쉬 박사의 말마따나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월적인 어떤 그 이상의 존재가 가진 특성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는가.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바퀴벌레는 어떤 그 이상의 존재라고. 이를 정확히 지칭할 수 있는 적합한 단 하나의 단어를 찾기 위해서라도 어휘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

영화 <조의 아파트>

 이런 맥락에서 <조의 아파트>가 보여준 상상력은 기발한 것을 넘어 도발적이다. 영화 속 바퀴벌레는 단순한 바퀴벌레가 아니라 인간처럼 말도 하고 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심지어 TV 방송까지 송출하고 있다. 인간과 친구를 맺고 주인공의 연애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아니, 바퀴벌레는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존재 그 이상의 무엇이라니까요? 이 영화는 바퀴벌레를 인간의 수준으로 추켜올린 상상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바퀴벌레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아주 도발적인, 바퀴벌레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바퀴벌레들만 보는 TV 방송이라니, 바퀴벌레는 연락을 위한 주파수 따위는 필요 없는 '어디에나 있는 자'인데.


4.

 친구가 일하는 오피스텔에 놀러 가 술 한잔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 친구와의 만남은 얼큰히 취해 잠드는 것으로 마무리 짓곤 했고, 그날도 역시 오피스텔에서 술을 한껏 들이켜고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눈뿐만 아니라 정신도 반쯤 풀려 당일 있었던 일인지, 다음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당일과 익일 사이, 나는 술에 취해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그분'을.


 깜짝 놀란 나를 껌뻑껌뻑 쳐다보는 친구에게 '바퀴벌레를 본 것 같아'하고 말했다. 그 친구는 '아, 그래? 있을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짐짓 긴장한 것 같은 목소리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아님 말고) 조심스럽게 바퀴벌레가 들어간 것 같은 책상 밑 짐들을 살며시 치워 확인했을 때, 놀랍게도 바퀴벌레는 없었다. 당연했다. 바퀴벌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자'니까. 겉으로는 '아, 다행이다'라며 웃음을 보였지만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을 참을 수는 없었다.


5.

 언젠가 바퀴벌레는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눌 것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물론 해충방제업체들을 처단하는 일이겠지. 그들은 우리 한 명, 한 명 죄를 물으며 인류를 단죄할 것이다. '<조의 아파트>를 보았느냐', 솔직히 웃었습니다. '<미믹>을 보았느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좋아합니다요. '<공포의 촉수>를 보았느냐', 그 영화도 압니까? 생각보다 지 나오는 건 챙겨보는 성격이시구나. '<맨 인 블랙>을 보았느냐', 아 더럽게 꼬치꼬치 캐묻네, 90년대 태어난 사람 중에 그거 안 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쇼. 그렇다, 그 불경한 것들을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적어도 혼자 죽진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허튼 생각 끝에 오늘도 부엌 한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 약이 잘 있는지 확인한다. 언젠가 그 작은 크툴루가 불손한 우리를 단죄할 날을 두려워하며.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8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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