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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19. 2023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2023_04. 영화 <윤희에게>

1.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언제부턴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몇 해 전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잡념이 많아졌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인지 어쨌든 누군가가 꿈에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놓친, 그리고 내가 놓은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후회 내지는 아쉬움이 내 무의식 속에 세월이라는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2.

 꿈이라는 것은 본디 인지라는 개념과 함께 붙어 다닌다. '자고 일어나 보니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 내지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꿈이구나' 따위의 인지 과정이 없다면 겪는 나에게 있어 그것은 현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꿈이다'라는 인지가 있으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었느냐'라는 꿈의 범위를 되짚어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가끔 이것이 굉장히 잔인한 경우일 때가 있다.


3.

 영화 <윤희에게> 속 쥰은 윤희 꿈을 꾼다. 쥰은 고모와 대화한다. "요즘 꿈에 자꾸 윤희가 보이네/무슨 꿈을 꿨니?/그냥 같이 있어, 꿈에서" 그토록 바랬던 그 순간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한순간 한순간 되짚어보며 그 모든 것이 실제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기까지, 쥰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을지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진다.


4.

 쥰의 무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윤희는 어떤 의미였을까. 쥰은 아직도 윤희를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 윤희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그런 쥰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게도 그저 윤희의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의 부재'라는 것보다 사람을 작게 만드는 것이 없다. 존재의 '없음'은 겪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을 아주 작게 축소시키게 만든다. 가장 기본적인 것마저 충족되지 않으니 '이것만이라도'라며 애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있음' 이상을 바랄 수 없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일찍 철이 들어 떼쓰지 않는 아이를 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5.

영화 <윤희에게>

 극의 마지막, 윤희는 본인이 쓴 편지를 읽는다. 마지막 한 줄, '추신, 나도 가끔 네 꿈을 꿔'라는 문장. 이는 윤희 또한 쥰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 두 인물이 겪은 '부재'에 관한 영화다. 두 사람이 각자 버텨내고 있던 상대의 부재, 이를 보여주는 것이 꿈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그로 인한 그리움을 이겨내려는 방어기제가 '허상으로 쓰다듬기'뿐이라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다.


6.

 내가 꾸는 꿈에 그 둘만큼 오랜 관계가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다만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내 꿈에 나오는 존재들이 '내 꿈에 그대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앓았을 감정과 그들이 가진 존재의 크기를 살다가 한 번쯤 알아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축복받은 존재라면 그들도 꿈에서나마 나를 찾는 일도 한 번쯤은 있기를. 언젠가 먼 훗날 '가끔 네 꿈을 꿨어'라는 말로 각자 느꼈던 서로의 없음을 공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제목 출처, 황인숙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중 「꿈」에서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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