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유소가맥 Jan 22. 2023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졌어

2023_05.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1.

 뉴스를 봤다. 국립국어원의 발표였다. 그동안 '아르'로 적던 'R'의 한글 표기를 '알'로 표기해도 인정하기로 했단다. 세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복수 인정이고 나발이고 여태까지 알파벳 'R'의 한글 표기가 '아르'였다고요?


2.

 나는 지금껏 'R'이 '알'이 아니라 '아르'라고 표기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그 정보를 '모른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니 그것에 대해 생각이나 해봤어야 모른다는 것을 알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모른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제와 생각해 보면 'VR'을 '브이아르'라고 표기하거나 'AR'을 '에이아르'라고 표기하는 신문 기사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을 '알'로 표기해야 한다는 그 믿음은 왜인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균 독서량에 비해 몇 권 정도는 더 읽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취업 생각하면 경영학과가 좋을 텐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기어이 국어국문학과에 찾아가 복수전공까지 마무리했다. 심지어 KBS한국어능력검정을 두 번이나 봤다. 2-급 정도면 막 좋은 성적은 못되더라도 어디 가서 '이 시험 봤다' 말할 정도 성적은 되지 않나? 그러니까, 내 국어 수준이 그렇게 낮은 건 아니지 않냐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난 이 단순한 외국어 표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까. 그 뉴스를 본 순간,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사라졌다. 내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믿을만한 정보인가, 난, 이제 난 뭘 믿고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3.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 2>)에선 수많은 멀티버스들이 나온다. 말 그대로 '멀티버스'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원래 살고 있던 우주와 완벽하게 같진 않고 미묘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초록 불이 멈추는 신호고 빨간 불이 건너는 신호라든가, 주인공이 걸치고 다니는 망토가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라든가. 완다 막시모프는 두 아들이 실존하는 멀티버스에 찾아가 아이들을 데려오려 한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드라마 <완다 비전>을 보지 않으면 두 아들에 대한 완다의 집착을 공감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에선 완다의 아들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기에 영화만으로 시리즈를 접한 관객들에게 두 아들은 뜬금없는 얘기일 뿐이다. 심지어 실제 아들도 아니고 꿈에서 나온 아들 때문에 저 사단을 만든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하지 않은 관객들도 간접적으로나마 멀티버스를 체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태까지 봐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속한 영화가 맞긴 하는데,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완다를 만났으니 말이다.


4.

 국립국어원의 발표가 담긴 기사를 보니, 그리고 'R'의 원래 표기가 '아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순간 나도 멀티버스를 경험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아니, 복수 인정 필요 없어요, 전 '아르' 얘랑은 초면이에요, 그냥 '알' 하나만이 올바른 표기로 인정되는 멀티버스에 가서 '알' 단독표기 데리고 올게요.


 <완다 비전>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디즈니 플러스 국내 오픈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출퇴근 길에 <완다 비전>을 보며 완다의 기구한 삶에 눈물을 훔쳤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두 번째 쿠키영상으로 공개된 <닥터 스트레인지 2> 예고편에 완다가 등장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개봉 당일 <닥터 스트레인지 2>를 보기 위해 부리나케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 모든 순간을 겪고 느끼고 공감했던 완다보다 지금 '아르'를 만난 내가 느끼는 완다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나도 드림워킹을 할 수 있었더라면.


5.

 그래, 그 멀티버스는 그럴 것이다. 'R'의 표기가 애초부터 '알' 단독 표기였을 것이다. 아마 'Multiverse of Madness'를 '대혼돈의 멀티버스'라고 번역하는 이상한 사람들 또한 없는 옳게 된 멀티버스일 것이다. '왜 네가 몰라놓고 애먼 곳에서 난리야'라고 말한다면, 맞다, 이것은 내 무지에서 오는 창피함의 몸부림이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7221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