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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26. 2023

이 영화를 '실사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2023_06. 영화 <아바타: 물의 길>

1.

 지난 2009년, 영화 <아바타>를 보며 생각했다. '이걸 실사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다만 그 당시에는 사유하는 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고, 딴지를 걸기엔 일단 영화가 묘사하는 판도라 행성이 너무 매력적이었기에 그에 대한 깊은 고찰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영화 <라이온 킹>

 이에 대한 생각은 2019년 <라이온 킹> 개봉 때 다시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카메라로 실제 현실을 촬영한 장면은 단 한 장면 밖에 없다고 한다. 당연히 그 안에서 연기하는 동물 모두가 CG고 그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현장 또한 CG다. 실제 분류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대체로 이 영화를 '<라이온 킹> 실사 버전'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촬영한 장면은 단 한 장면뿐인 실사 영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실사처럼 보이니까요'


2.

영화 <아바타: 물의 길>

 2022년 말, 영화 <아바타: 물의 길>(이하 <아바타 2>)이 개봉했다. 전편으로부터 대략 13년 만의 속편이다. 그동안 발전한 CG 기술을 토대로 판도라 행성을 전보다 더 확장시켰다. 개인적인 선호를 빼놓고 생각하더라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CG 기술을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근 몇 년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이를 뛰어넘는 CG 기술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비주얼이다.


 그렇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비주얼이다. 그 말은 반대로 '결국 실제가 아닌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걸 실사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 <아바타>보다 실제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 더 적고, 극 중 유일하게 비중을 가지고 활약하는 인간 캐릭터인 '스파이더'의 몸 또한 CG로 처리했다.(쿼리치와 설리의 대결보다 더 불안했던 그의 의상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행인 부분일 수도)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실사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에 실제 사람을 몇 명 삽입한 것에 가깝지 않은가?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

 물론 배우들이 실제로 몸을 쓰며 연기하고, 심지어 직접 잠수까지 해가며 힘들게 촬영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를 생각해 보자. <폴라 익스프레스> 또한 모션 캡처를 통해 배우들이 직접 연기한 영화다. 제작사 워너는 이 영화를 아카데미 실사 부문에 출품할지, 애니메이션 부문에 출품할지 아카데미에 자문까지 구했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너무 당연하게 애니메이션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바타 2>와 <폴라 익스프레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영화 제작에 접근한 방식도 달랐을 것이고, 당연하게도 사용 기술 또한 크게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 둘을 비교하는 방식은 단 하나다. 이는 앞서 <라이온 킹>을 실사 영화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다. '<아바타 2>는 조금 더 실제같이 보이고, <폴라 익스프레스>는 조금 더 애니메이션처럼 보여'


 그렇다면 같은 제작방식을 통해 <폴라 익스프레스>를 조금 더 실제처럼 만들었다면 우리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실사 영화라 정의했을까? 반대로 먼 훗날 CG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해 <아바타 2>의 CG가 찰흙 폴리곤 덩어리 같이 형편없어 보이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아바타 2>를 애니메이션이라 정의할 것인가? 우리가 '실사'라고 말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실사 영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나누는 기준은 굉장히 감상적이다. 바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3.

 영화의 역사는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해 영화 <열차의 도착>을 상영한 189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영상 자체가 189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영상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에디슨(우리가 흔히 아는 전기 그 사람)은 '키네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했다. 만들어진 게 1891년이고 사람들에게 공개 전시한 것이 1894년이라고 하니 발명과 공개, 둘 중 어느 부분을 기준으로 잡아도 우리가 영화 역사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1895년보다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에디슨의 영상은 영화 역사의 시작이 되지 못한 것일까?


영화 <열차의 도착>

 어떤 매체의 역사를 정의할 때, 그 시작점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특정 매체로 불리기 위한 조건을 정하고 그 기준을 충족한 최초의 순간을 역사의 시작으로 볼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래프'와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중 상영'이다. 그것이 그 둘의 운명을 갈라놓은 이유다. 사람들은 영화 역사의 시작을 대중 상영이 최초로 이루어진 1895년으로 정했다. 즉, 영화가 충족해야 하는 필요조건은 '대중 상영'인 것이다.


4.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지난 2017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칸 영화제 경쟁 부분 심사위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그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에 황금종려상이 돌아간다면 거대한 모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황금종려상이나 다른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을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도덕적, 성적 관념을 도발적으로 다룬 영화를 다수 연출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같은 기존 관념에서 벗어난 감독이 'OTT 공개 영화에게 영화제 상을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는 대중 상영에 대한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다.


 '영화는 대중 앞에 상영되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오랜 시간 흔들림 없이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합의다. 이 합의 위에 우리는 영화를 발전시켜 왔다. 아카데미 시상식 기준 또한 '미국 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아닌가. 그 조건에 따르면 OTT 영화는 '대중 상영'이라는 필요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나사 한 곳 빠진' 영화인 것이다. 이를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범주 내의 영화로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릴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1895월 12월 그랑카페에서 '대중 유료 상영'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이니까.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는 OTT 영화 관람 방법, 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돈을 지불하고 혼자 영상을 들여다보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우리가 OTT 구독료, 혹은 스토어에서 영화 값을 지불하고 휴대폰으로 혼자 영화를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OTT 영화가 기존 극장 상영 영화와 같은 범주 내로 들여온다는 것은 우리가 합의했던 '영화'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영화 역사' 또한 몇 년 앞당겨야 하는,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거대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사실 몇몇 영화인들의 이런 의견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영화인들은,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OTT 영화를 이미 오래전부터 극장 영화와 다를 바 없는 영화로 여기고 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지'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물론 있지만 그렇다고 'OTT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넷플릭스 영화보다 영화관에 걸린 영화들이 훨씬 못할 때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를 인정한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사건'의 혼란 속에 방황하다 끝끝내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하고 새로운 합의점을 찾은 것인가? 아니다, 애초에 '대중 상영'을 지표로 영화를 분류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영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중 상영? 아니다, '영화처럼 보이는 영상'이다. 영화의 기준은 실사를 구분하는 기준에 비하면 나름 구체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으로 합의한 영화라는 개념 안에선 OTT 영화는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우리는 OTT 영화를 충분히 영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5.

 실사와 영화의 기준에 대한 부조화가 발생한 이유는 '기술'과 '공감'이다. 의심 없이 유지되고 있던 합의에 균열이 생긴 이유는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실사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CG 기술과 어디서든 영상을 소비할 수 있도록 만든 통신 기술 말이다. 그것을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는 의외로 사람들의 공감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공감은 '이게 그럴듯하게 보이냐'라는 무섭도록 단순한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기존 합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그걸 그렇게 생각하느냐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한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고 관객은 끊임없이 선별할 것이다. 이 균열은 영화와 기술,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다.


 길게 늘여뜨려 얘기 했지만 결국 요는 이렇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인가'에 대한 기준, '이것이 실사인가'에 대한 기준, 두 기준 외에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믿고 사는 그 많은 것들이 객관적인 지표 없이 관념적인 합의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과학이나 수학이 아닌 이상에야 철저히 객관적인 지표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다만, 이렇게 관념적인 합의 위에 살아간다면 한 번씩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기준이 맞는 것인지. '실사'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지, '영화'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지, 그것들이 지금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기준이 맞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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