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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29. 2023

세상은 점점 물성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2023_07.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1.

 수도권 사람과 지방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시내'라는 표현을 쓰냐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지방은 대부분 '시내'로 칭하는 곳이 한 곳 내지는 두 곳 정도라 택시에 타서 '시내로 가주세요'라든가 친구와 약속을 정하며 '시내에서 만나자'라는 말이 통한다나 뭐라나. 듣고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는 지역도 과거와 비교해 번화가로 명명되는 구역이 몇 곳 더 생기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시내라고 부르는 곳은 한 곳으로 정해져 있다.


2.

 그곳엔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큰 서점이 있다. 직접 평수를 측정해보지 않아 이 지역 내에서 가장 넓은 곳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지역의 '시내'에 자리 잡은 서점이니 어련히 가장 크지 않겠냐는 심리적 요건이 강하게 들어간 판단이다. 그 서점은 내가 시내에 갈 때 무조건 방문하는 나만의 필수 코스다. 아무래도 큰 서점이다 보니 책뿐만 아니라 공책, 필기구, 다이어리 등 응당 서점이면 팔아야 할 제품부터 키보드, 마우스 따위의 작은 전자기기까지 진열해 놨는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품은 구석진 자리에 두세 칸 정도 꽉 채워진 블루레이였다.


 서점에 기웃거리며 내가 가장 많이 봤던 것은 웃기게도 책이 아니라 블루레이였다.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 뒀기 때문에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양 옆에 있던 휴대폰 케이스와 같은 상품들이 블루레이 자리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두 칸 하고도 반정도 자리 잡고 있던 블루레이를 위한 공간은 두 칸으로, 또다시 한 칸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블루레이들은 자리를 잃었다. 이후 어떻게 처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것들은 사라졌다. 


3.

 난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없다. 과거 웬만한 컴퓨터 CD롬에 DVD 플레이 기능이 겸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블루레이 플레이 기능이 겸해져 있는 CD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 컴퓨터에는 없었다. 언젠가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야지, 생각은 했으나 블루레이만을 고집하기엔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의 가격 경쟁력과 편리함이 너무 강력했다.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나에게 블루레이란 '책꽂이에 꽂아 전시하는 장식' 정도의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활용 없는 물건들이라 할지라도 아주 조금의 따뜻한 시선 한 번이면 효용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있던 특별한 의미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블루레이는 내가 극장을 나서도, 더 이상 상영관에 영화가 걸려있지 않더라도 그 영화와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다. 이것들은 그 영화를 얼마나 애정하느냐에 대한 증표와 같다. 누가 봐도 사용하지 않을 법한 물건에 몇만 원씩 돈을 투자해 가며 가져오는 것은 웬만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4.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던 찬실이 함께 작업하던 감독의 죽음으로 인해 영화 일을 잠시 그만두고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영화다.


 한순간 직장을 잃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찬실은 방세를 아끼기 위해 언덕 꼭대기 월세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찬실이 선두에 짐을 이고 뒤를 이어 영화 업계 후배들이 옷가지, 이불 등을 각자 들고 줄줄이 따라 올라온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찬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옮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5.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는 지표와 같다. 인생을 되짚어 볼 때, 별 다른 증거가 없는 한 그 사람의 물건이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때문에 한 사람이 특별히 아끼던 물건은 일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극 중 찬실이 영화 일을 그만두겠다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영화 잡지, 책들을 모아 버린 것이었다. 이때 버린 것은 그저 책가지들이 아니다.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였다. 극 중 직접 대사로 언급했듯, 연애 한번 하지 못하고 영화에 몰두해 살아왔다. 아무 영화나 잡히는 대로 한 것도 아니고 특정 감독과 예술 영화만 담당해 왔다. 영화 프로듀서는 직업 정도가 아니라 찬실의 인생을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그런 찬실에게 영화 서적들은 그녀가 영화와 함께한 시간을 따라갈 수 있는 지표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정리한 영화 소장품들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같은 이유로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의 소유권을 포기하겠다, 내지는 물건을 폐기처분하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듯 물건은 누군가의 인생을 보여주며 때때로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다.


6.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 세 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후에 찬실과 가까워진 집주인 할머니가 찬실에게 허락한 것은 들어가지 말라 그랬던 방 문을 열고 방 안에 채워진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방에는 할머니의 딸이 가지고 있던 영화 소장품들이 있다. 여기서 할머니가 찬실에게 공유한 물건은 찬실에게 열린 마음과 긍정적인 관계 발전을 보여준다.


 찬실은 그 방에서 오디오 테이프를 재생한다. 그곳에 녹음되어 있던 것은 '정은임의 영화음악'이다. 오래전 송출된 라디오 방송이다. 형체 없이 떠돌며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버릴 수도 있었던 주파수들이 오디오 테이프를 통해 형체를 가지고 남아있게 된 것이다. 오디오 테이프가 없어진다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방송을 했다는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테이프가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는 누군가 그 방송을 소중히 간직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찬실이 테이프를 재생한 순간 찬실과 할머니의 딸인 테이프 주인 그리고 라디오 DJ 정은임, 셋은 연결된다. 물건은 사라져 버린 존재들을 한 공간에 머물도록 한다.


7.

 찬실이 영화를 그만두겠다 결정했을 때와 반대로 영화를 계속하겠다 마음먹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이 버려둔 영화 소장품들을 다시 방으로 들고 온 것이다. 사실, 찬실이 영화 일을 하며 그 책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겠는가. 그런데 물건이란 게 그렇다, 그것을 단순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한 결심을 내보이고 강화하게 된다.


 찬실이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이 외장하드에 저장된 파일이었다면, '정은임의 영화음악'이 오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었다면, 그들이 직접 손으로 옮기고 재생시킨 그 모든 일들의 의미가 퇴색됐을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물건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의지, 관계와 존재, 그리고 결심을 보여준다.


8.

 내가 블루레이 코너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누군가의 물건이 그냥 물건이 아니듯 블루레이를 비롯한 영화 매체는 그냥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만의 영화를 책꽂이에 꽂아 소장해 둔다면 언젠가 사람들은 그 영화를 토대로 그 사람의 삶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 인생도 아닌데 괜스레 벅찼다. 하지만 내 감정과는 무관하게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또 하나의 물건이 자리를 잃는구나 서운했고 많은 사람들이 얼마 안 가 휘발될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면 어쩌나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물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편리한 세상으로 변해갈수록 사회가 삭막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애꿎은 핑계를 둘러대본다.


 어쨌든 자주 가던 서점 한편에 꽂혀있던 블루레이들은 사라졌다. 이렇게 세상은 점점 물성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5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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