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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an 12. 2023

인물을 관통하는 한마디 대사

2023_02. 영화 <건축학개론>

1.

 감상하는 모든 영화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영화, 한 번씩 다시 꺼내보는 영화는 그 영화를 설명하는 한마디 대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영화가 그럭저럭 적당히 만든 정도만 되더라도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 혹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요소가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게 세트든, 이야기 구조든, 대사든, 아니면 인물 그 자체가 되었든 요리조리 살펴보면 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찾아 영화를 설명해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이 작은 놀이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 난 후부터 혼자 즐기기 시작했는데,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해 보자면 극 중 과거 승민의 대사 한 줄이 그 시작이었다.


2.

영화 <건축학개론>

 '나 무거운 거 드는 거 좋아해'라는 극 중 승민의 대사가 있다. 서연의 이사를 돕던 중 '무겁지?'라는 서연의 말에 대한 승민의 대답이었다. 영화를 처음 볼 때, 이 대사를 듣고 속으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무거운 거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승민의 속이 빤히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순수한 거짓말이 그렇게 귀엽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소년, 방법을 모른다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상황, 도와주겠다고 왔으니 든든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부담감, 몸도 힘들고 마음도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어나가야 하는 대화, 그 모든 인물의 성격과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가 '나 무거운 거 드는 거 좋아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과거 승민이라는 캐릭터는 이 대사를 통해 완성됐다. 승민이를, 그리고 러닝 타임의 반이 넘는 시간을 할애해 보여주는 첫사랑의 풋풋함을 요약해 주는 대사 말이다. <건축학개론>이 대사 하나하나 버릴 것 없는 불세출의 걸작이다,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이 대사 하나만큼은 정말 훌륭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건축학개론>이 나올 때면 위 대사를 종종 언급하곤 했다. 내가 알아낸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한 시기의 누군가를 한 마디 대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꽤 멋진 일이라는 생각도 크게 있었기 때문이다.


3.

 내가 하는 말이 나를 정의할 때가 있다. 그 한 문장은 나 스스로를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되고 싶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나에게 있는 결핍을 위장하고 있기도 하며, 간혹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묘사하기도 한다. 뭐가 되었든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나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본인을 설명하는 대사를 찾는 것은 그 당시 가장 의미를 크게 두었던 무언가를 찾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4.

 나를 설명하는 한마디 대사가 뭘까, 찾아보려니 아무래도 '가장 많이 하는 말'을 살펴보게 된다. 세보진 않았지만 내가 평소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예상컨대 '그럴 수 있지'다. 언제부턴가 입에 붙어 무슨 일만 있으면 습관처럼 내뱉곤 했다. 무슨 일이든 '그럴 수 있지'라는 말 한 마디면 '그건 맞지'하고 넘길 수 있는, 아주 멋진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넓은 아량을 가지고 살고 있냐 물어본다면 슬프지만 너무 아니다. 안타깝게도 난 여전히 소심하고 뒤끝 있는,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하며 잠 못들고 이불 속을 뒹구는, 아주 볼품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그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5.

 흔히들 '사람 안변해'라고 하지만 같은 면이 강화가 되든 아예 반대가 되든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사람도 변한다. 어중이떠중이로 겪어봤지만 그게 얼추 맞는 것 같다. 같은 맥락으로 나를 설명하는 말도 시간이 지나면 변할 것이다. 인생의 매 순간, 평생 동안 단 하나의 대사만 안고 살 수는 없으니.

영화 <건축학개론>

승민도 마찬가지 아닌가, '무거운 거 드는 거 좋아하는' 승민은 이미 흘러 지나간 추억 속 등장인물일 뿐이다. 직장 생활에 찌들고, 약혼녀와 짜증 섞인 다툼을 벌이고, 화를 못 이겨 발로 차던 대문 앞에서 슬퍼하는 승민은 과거의 '무거운 거 드는 거 좋아하는' 승민이 아니다. 영화 자체도 이미 첫사랑의 풋풋함을 보여주기보다는 첫사랑을 정리하는 과정이 더 중점적이지 않는가. 근데, 또 그럼 어떤가. 그때는 또 그때의 대사를 찾을 것이다.


 묶여 살 필요는 없다. 한 시기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 대사를 찾는 것, 그것이 중요한 거지. 이미 승민과 같이 순진한 나는 사라지고 없더라도, 그때 나를 설명하던 대사는 더 이상 나와 어울리지 않더라도, 그 한 마디 대사를 통해 그때의 나를 되짚어보고 지금의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승민이 옛사랑을 보내주고,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듯이, 나도 내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며 지금의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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