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53
후보 기준
장편: 한국 기준 2024년 12월 15일~2025년 12월 14일 개봉작
단편: 2025년 국내 영화제 상영작
올 해의 영화 (장편, 국내): <세계의 주인>
후보
어쩔수가없다
바얌섬
3학년 2학기
여름이 지나가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의무라는 의견이 있다.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와 동시에 아직은 아름다운 세상임을 보여주는 것도 영화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한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인 주인공이 나오지만, 소재를 자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다. 윤가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누군가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전달하면서도 이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자신의 말을 덧붙인다. 과잉되지 않는 감정, 구태여 강조하지 않는 상황을 통해 주인이 지금까지 지켜온, 그리고 또 다른 주인들이 지켜갈 일상을 굳건하게 보여준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윤가은 감독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지게 만든다.
올 해의 영화 (장편, 국외): <그저 사고였을 뿐>
후보
브루탈리스트
미세리코르디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씨너스: 죄인들
정치적 상황은 종종 예술가들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게 만든다. 영화 또한 예술의 범주로 분류되는 한 크게 다르지 않다. 프리츠 랑이 독일에서 프랑스로, 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에서부터 이미 앞으로의 정치와 영화인 사이의 관계가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자신의 땅을 지키고 있는 감독이다. 영화가 공개될 때마다 이란 당국의 징역과 출국금지 명령을 선고받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영화다. 그렇다고 단순히 체제에 대한 비판만 담긴 것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인간군상을 스릴러의 작법으로 풀어내 장르적인 재미까지 챙긴다. 메시지와 재미, 그리고 윤리적인 논의까지 어느 한 부분 놓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한다.
올해의 영화 (단편, 국내외): <별나라 배나무>
후보
첫여름
미미공주와 남근킹
층
음어오아
버려진 아기 고양이를 시작으로 울타리 너머 세계를 만나는 영화 <별나라 배나무>는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일상 속 무언가를 천천히 관찰한다. 누구도 주의 깊게 쳐다보지 않지만 분명하게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명의 존재를 포착하여 우리 인식을 복기시키고 이를 통해 의미 없는 것들에 숨겨진 의미를 담아낸다. 이 시선을 통해 영화가 세상을 재편하는 과정은 굉장히 세심하고 별 다른 사건이 없음에도 흥미롭다. 여기에 더해 따뜻한 물성을 느낄 수 있는 화면 질감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데워지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신인감독: 장병기 감독 (여름이 지나가면)
후보
박준호 감독 (3670)
차정윤 감독 (만남의 집)
엄하늘 감독 (너와 나의 5분)
김유민 감독 (바얌섬)
도시 성인의 논리와 교외 소년의 논리가 1:1로 대응 가능하다는 생각은 미성년의 원초적인 세계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어른들의 몰이해에서 시작된 착각이다. 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은 이런 몰이해로 인해 타자화된 아이들의 일탈을 다룬다. 장병기 감독은 잘 설계해 놓은 배경 아래 주인공 '기준'이 '영문' 일행에 동화되고 다시 경계 짓는 과정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주요 인물들을 다루는 손길은 섬세하고, 배우들 또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역량 아래 영화 말미까지 감정을 능숙하게 끌고 간다. 이렇듯 영화를 꼼꼼하게 구축하는 솜씨는 올해 봤던 다른 데뷔작들보다 더 눈에 띈다.
올 해의 배우 (남, 국내): 박정민 (얼굴)
후보
이병헌 (어쩔수가없다)
최현진 (여름이 지나가면)
조유현 (3670)
홍경 (굿뉴스)
박정민 배우가 '영규'로 분하며 펼친 연기는 여태껏 보여줬던 것과는 또 다른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 작품들에서 펼쳤던 연기보단 조금 더 과장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행동, 표정, 대사 처리는 박정민 배우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한다. 자칫 잘못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선을 아주 능숙하게 타며 영규가 오랜 시간 인이 박히게 느꼈을 모멸감 혹은 삐뚤어진 자존감을 적합하게 표현한다. 이는 같은 작품에서 1인 2역으로 연기한 '동환'과의 경계도 명확하게 만들어낸다. 이미 많은 작품을 통해 수려한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영화 <얼굴>을 통해 보여준 그 실력은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또 다른 느낌의 연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올 해의 배우 (여, 국내): 염혜란 (어쩔수가없다)
후보
장영남 (비밀일 수밖에)
이혜영 (파과)
이설 (침범)
서수빈 (세계의 주인)
어느 배우를 볼 때 관객들이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당연하게도 그 배우는 해당 이미지에 맞는 배역을 맡게 된다. 이제 반대로 이미지에 맞춰 맡은 배역에 따라 관객들이 배우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렇게 고착화된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영화 <어쩔수가없다> 속 염혜란 배우가 선보인 '아라'는 우리가 배우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를 기분 좋게 빗겨나간 유쾌한 변주다. 배우가 배역에, 배역이 극에 잘 녹아들게 하는 것은 여러 제작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지만 1차적으로는 결국 배우에게 달려있다. 아라로 분해 말 그대로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니는' 염혜란 배우를 볼 때, 특정 이미지를 표현하는 배우가 아닌, 그저 맡은 배역 모두를 능히 소화하는 배우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올 해의 배우 (남, 국외): 숀 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후보
애드리언 브로디 (브루탈리스트)
티모시 샬라메 (컴플리트 언노운)
아담 드라이버 (페라리)
마이클 B. 조던 (씨너스: 죄인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숀 펜은 변태, 마초, 인종차별주의자 등 같이 붙여 놓았을 때 긍정적 시너지라고는 단 하나도 발생할 수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이 집약된 캐릭터 '록조'를 마치 본인인 양 아주 완벽하게 소화한다. 이 말이 배우에게 칭찬으로 들릴지, 험담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의도는 분명히 칭찬이다. 소름 끼치도록 일체화된 연기를 통해 내로라하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으로 서스펜스를 장악한다. 영화 후반부로 넘어가선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활용하여 격양된 감정을 표현하는데, 단순히 '잘한다'를 넘어선 어떤 경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올 해의 배우 (여, 국외): 에이미 메디건 (웨폰)
후보
조 샐다나 (에밀리에 페레즈)
페넬로페 크루즈 (페라리)
엠마 스톤 (부고니아)
마리암 이샤프리 (그저 사고였을 뿐)
익숙하지 않은 소재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은 끝끝내 관객을 설득해 낸다는 뜻이다. 비교적 공감이 어려운 서양 오컬트 장르, 이역만리 타지의 주술을 쓰는 마녀에게서 섬뜩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관객을 설득해 내는 가장 큰 힘은 '글래디스'를 연기한 에이미 메디건이다. 사실상 영화 후반부를 에이미 메디건이 이끌어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한 매력을 뽐내는데, 영화 <웨폰>에 대한 평가는 이 배우로 인해 조금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압도적으로 좋았던 한두 편의 영화가 아닌, 평균적으로 준수한 영화들이 주를 이뤘던 한 해인 것 같다. 신인감독들의 등용문으로 불리던 미쟝센단편영화제가 4년 만에 부활하는 등 단편/독립영화 쪽에도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 비교적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올해 단편 영화 라인업에 대한 아쉬움도 달래줬다. 영화 시장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매년 그랬듯 내년에 만나게 될 영화들에 막연하고도 희망찬 기대를 걸어본다. 영화계를 비롯하여 사회 곳곳에서 사건사고 많은 한 해였다. 무탈하게 보낼 내년을 기원하며 이렇게 올해도 영화 일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