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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뭐가 되었든 소주 한 잔은 확실히 당기는 영화

2025_24. 영화 <소주전쟁>

by 주유소가맥

1.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한 명 있다. 내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20살 때부터였으니, 그 친구를 알고 지낸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는 알코올과 비슷한 것조차 섭취하지 않은 상태로 매일같이 만나 시간을 죽이곤 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고,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되었다. 여느 날과 같이 친구 자취방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그날따라 뜬금없이 '우리 뭐 할까'라는 질문을 했다. 당연히 답은 '나가서 술이나 마시자'였는데, 그때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불과 몇 개월 되지도 않았지만 그 짧은 사이 술을 접하기 전 우리가 만났을 때 뭘 하고 놀았는지 그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침투력도 강하고, 존재감도 강하다.


소주전쟁 포토 (1).jpeg 영화 <소주전쟁>

젊고 돈 없는 우리가 선호했던 주류는 당연히도 소주였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도 편의점 가격 기준 2,000원이 채 넘지 않으니 적은 돈으로 취하기엔 이만한 가성비가 없었다. 그러니까, 술, 그것도 소주는 우리에게 특별한 술이었다. 아마 술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애주가들은 소주를 좋아하진 않더라도 소주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국민 술'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지. 그래서일까 영화 <소주전쟁>은 다른 소재의 영화들보다 한번 정도 눈길이 더 갔던 것은 사실이다.


2.

소재는 소주 회사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소재일 뿐, 이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자본주의의 매서움을 보여주는 금웅 시장의 생리다. 아무래도 같은 시기를 다뤘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겹쳐 보인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공통적인 부분은 냉철한 논리보다는 감정적인 부분에 많이 기댄다는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 개봉 당시 영화 <빅 쇼트>가 불려 나와 비교되곤 했었는데,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부도의 날>은 뜨겁고 감정적이며, <빅 쇼트>는 차갑고 논리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국가부도의 날>의 자리에 <소주전쟁>을 넣어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대 기업의 M&A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암투를 냉철하게 그려내는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그 기대와 많이 다른 영화의 결을 보고 다소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3.

소주전쟁 포토 (3).jpeg 영화 <소주전쟁>

영화는 악역이 뚜렷하지 않다. 물론 '우리의 기업 국보'를 잡아먹으려 하는 솔퀸과 몇몇 직원들이 악역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굉장히 감정적인 논리다. 영화는 곳곳에 악역을 심어 놓는다. 자기 잇속만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재벌 회장은 국보 소속이지만 무능력하고, 악역으로 그려진다. 국보의 법률 자문을 돕던 법무법인 무명의 변호사 또한 법대로 사는 인물이 아니다. 주인공 둘 중 한 명은 국보를 집어먹을 솔퀸 소속이다. 그나마 선인으로 보였던 종록 또한 결국 그 자본주의의 생리를 받아들인다. 특정한 공공의 적을 만들어두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여러 입장차를 만들어 두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각 위치의 인물들에 대한 다면적인 묘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4.

영화는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열심히 수행해 내는 종록과 다른 어떤 가치보다 돈이 가장 먼저인 인범을 대칭시켜 자본주의 체계 속 인간성과 가치를 비판하고자 한다. 다만, 영화 후반부 급격하게 돌아서는 두 인물의 입장 차이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여 그 주제의식은 빛을 잃는다.


5.

소주전쟁 포토 (4).jpeg 영화 <소주전쟁>

그래도 배우들의 열연은 돋보인다. 유해진 배우의 소탈한 회사원이자 치열하게 IMF를 견딘 그 시대의 중년층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이제훈 배우는 배역 특성상 영어 대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수행해 낸다. 손현주 배우나 바이런 만 배우 역시 각자의 자리를 빛낸다. 여러 배우들이 구멍 없는 실력으로 채우는 연기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6.

여러모로 아쉽다. IMF 시기는 여러모로 힘들었던 역사지만, 영화적인 소재를 끌어내려면 한없이 끌어낼 수 있는 시기인 것도 사실이다. 보다 냉철하고 차갑게 이야기를 끌어낸다면 꽤 훌륭한 경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그 성과가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주전쟁> 또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일단 소주 한 잔 당기는 영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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