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26. 영화 <토리노의 말>
1.
"영화 하나 추천해줘 봐"라는 말은 아마 영화 좀 좋아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항상 묶여 다니는 형제로는 "이 영화 어땠어요?"가 있다. 뻔한 이야기다. 극장에 가거나 집에서 VOD를 통해 보거나, OTT로 본다고 하더라도 어찌 되었건 피 같은 돈을 투자해야 하고 그보다 더 비싼 시간도 투자해야 한다. 1,2 분도 아니고 2시간, 심지어 요즘은 상업영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3시간에 가까운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다. 돈은 어찌어찌 번다고치지만 어디서 빌릴 수도 없는 시간은 어떡하겠는가. 때문에 수많은 영화의 선택지 앞에 서면 우리 모두 평등해진다. '과연 이 영화는 내가 투자한 시간을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이 되는 영화인가.'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한다. 그런 고로 영화를 많이 본 사람에게 이 영화의 가치를 보증받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욕망이다.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아는 사람의 의견, 조금 더 나아가서 한 분야의 권위자의 말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큰 신뢰를 형성한다. 이는 영화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면서 만들어낸 모든 분야의 일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2.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영화 추천을 주고받는다. "이 영화 재밌어, 꼭 봐" 이렇게. 여기서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내는 사실 한 가지를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그 사람과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하는 습관, 옷 입는 스타일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제아무리 천생연분이라며 붙어 다니는 사이라도 서로 다른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사람과 나는 영화를 보는 취향 또한 같지 않다. 친구가 소개해준 영화가 나에게도 환상적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지만 반대로 그 친구의 영화가 나에게 최악의 영화가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가 추천해 준 영화가 최악의 영화라고 치자. 영화를 본 당사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영화 정말 별로였어. 너는 무슨 그런 영화를 추천하냐" 이건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만약 이 최악의 영화를 추천한 사람이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저명한 영화 평론가가 추천한 영화라면 과연 어떻게 바뀔까.
3.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 분야의 권위자의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신뢰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영화 평론가가 이야기 한 말은 관객들 사이에서 큰 신뢰를 형성한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 평론가가 극찬을 마지않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나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를 심어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가끔 영화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 속이게 만든다. 속인다는 것이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막상 볼 때는 지루해서 하품만 하다 극장을 나왔지만 영화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영화의 숨은 속 뜻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영화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하고는 괜찮은 영화 목록에 집어넣는 일, 바로 그런 것들이다.
4.
전에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영화 <토리노의 말>을 소위 '수준 높은 영화'의 전형처럼 생각한다. 언젠가 방문했던 한 독립영화협회 내부에 붙어져 있던 포스터의 주인공이 바로 <토리노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포스터를 봤던 기억이 왜인지 모르게 강렬하게 남아있었나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와서는 그 영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언젠가 접했을 때에도 그렇게 인상깊게 보지 못한 그냥 어려운 영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벨라 타르 감독을 알지 않는가. 평론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감독이고, 그리고 <토리노의 말>이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 영화지 않는가. 언제부턴가 나는 나도 모르게 <토리노의 말>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는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아마 내 생각이 아닌 평론가들의 생각임이 분명하다.
5.
그런데 간혹 여기서 더 나가는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영화에 대한 자세마저 바꿔 놓는다. 평론가들의 평을 따라다니며 나의 생각을 끼워 맞추고 끼워 맞춘 영화를 다시 사람들과 공유한다. 혹여나 그 영화가 재미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영화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니. 너 아직 영화를 볼 줄 모르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평론과 들과 같은 취향을 공유하고 있는 '품위 있는' 안목을 과시하려는 욕구도 종종 보이곤 한다. 때문에 포털 사이트의 영화 페이지를 들어가 평가란을 보면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가 보이곤 한다. 소위 '수준 높은' 영화들, 예컨대 전체적으로 철학적인 메시지가 보인다거나 고전 명작들의 오마주로 꽉꽉 채워져 있는 영화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예시를 들어가며 이 영화가 왜 훌륭한 영화인지를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반면 '수준 낮은' 영화들, 다시 말해 블록버스터나 코미디 같은 종류의 영화 평가 페이지에는 '이런 영화들이 왜 흥행하는지 모르겠다'며 영화 시장 수준을 개탄하는 모습도 종종 보이곤 한다.(애초에 위 처럼 수준 높은 영화, 수준 낮은 영화를 나눌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사람들을 쉽사리 분별해 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나부터도 속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가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영화의 미학적 성취에 감탄한다니..."하며 나의 낮은 수준에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높은 수준에 놀랄 때가 있고 과연 이 글들을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 사람들의 의견은 본인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지나가며 읽은 평론가들의 것일까.
6.
물론 평론가의 글을 찾아보거나 영화 추천을 주고받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아주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다만, 평론가들의 글이나 전문가들의 추천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에 우리의 생각과 취향이 그들의 의견에 침식되는 것을 주의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을 길게 늘여놓는 나조차도 전문가들의 말에 엄청 휩쓸리곤 한다. 여태까지 썼던 글들 중 모든 내용들이 100% 나만의 생각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좋은 영화는 내가 봤을 때 재미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내가 봤을 때 재미가 없다면 어떤 의미가 있더라도 결국 재미없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의 수준은 애초에 쉽사리 나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니 괜한 것들을 의식하며 영화를 보지 말자. 영화는 아무리 실제인 것 마냥 꾸며도 결국은 허구다. 허구를 보며 즐거워하는 우리들 마저 허구라면 이 얼마나 슬픈 아이러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