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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Feb 09. 2023

지금보다 더 나은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2023_09.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

1.

 어릴 적, 티비에서 방영한 <디지몬 어드벤처>를 참 재밌게 시청했다. 그 당시 동네 꼬마들 사이에선 디지몬과 포켓몬으로 강렬한 싸움이 붙곤 했는데, 결과는 뭐, 두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포켓몬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 운명적 만남>

 안타깝게도 그 이후 디지몬을 본 기억이 없다. '워 그레이몬이 참 멋졌는데'라는 생각만 간혹 할 뿐. 그게 애니메이션 시청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귀찮아서'라는 이유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유년시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나는 언젠가 세상을 구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멋진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된다면 마음 편하게 그 만화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2.

 그럼 지금은 그런 사람이 됐느냐?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심지어 그럴듯한 단어들이 덕지덕지 붙어 제목부터 거부감이 느껴지는)이라는 영화를 굳이 극장에서 본 건 주인공이 나처럼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홍보 글을 통해 타이치(태일이)와 야마토(매튜)가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으로 극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얘기를 듣자 그 두 사람에게 느껴보지 못했던 강한 유대를 느꼈다. 원래 현실에 치이면 어릴 적 추억에 매달리는 법이다. 왠지 이 두 친구를 만나고 싶어졌다.


 물론 간혹 떠올렸던 그 짧은 생각, '워 그레이몬이 참 멋졌는데'를 큰 스크린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다. 결과적으로 워 그레이몬이 등장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그 친구들은 여전히 꽤 괜찮은 애들이었다.


3.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디지몬 어드벤처>의 10여 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등장했던 선택받은 아이들 또한 하나둘씩 자신의 길을 찾아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던 중 전 세계의 선택받은 아이들에게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고, 에오스몬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타이치 일행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야기하는 것은 '어른'이다. 선택받은 '아이들'이었던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주인공이었던 타이치와 야마토는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며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가장 핵심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타이치와 야마토라고 답할 것이다. 그 둘은 친구들 사이에서 앞장섰던, 용기와 우정을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전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을 때, 그 두 인물만 아직도 디지몬에 열정을 쏟고 있고, 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두 주인공의 설정을 보면 그 노골적인 의도를 느낄 수 있다.


4.

 의도가 노골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안 먹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적어도 나에겐) 생각보다 효과가 컸는데 심지어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 <토이 스토리 3>를 봤을 때보다 더 크게 와닿았다. 아마 앤디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이지만, 타이치와 야마토는 그 '새로운 시작'을 통해 얻은 가능성의 끝에서 방황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

 영화의 마지막, 아구몬은 이제 어른이 된 타이치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한다. '타이치, 너 많이 컸구나'. 참, 만감이 교차하는 대사다. 마치 나에게 하는 얘기 같아 눈물이 났다. 티비에서 아구몬을 처음 봤을 때, 선택받은 아이까지는 아니었어도 가능성이 많은 아이였는데. 끝까지 나는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왔구나,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멋진 어른이 됐어야 했는데.


5.

 나는 선택받은 아이가 되지 못했다. 많은 어른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사회의 그저 그런 부속품으로 늙어가고 있다. 어릴 때는 선택만 받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이도 아니다. 그게 날 슬프게 한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9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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