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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May 21. 2023

홍콩 느와르의 낭만과 주윤발의 30분

2023_25. 영화 <영웅본색>

1.

 낭만. 홍콩 느와르 영화는 1990년대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고 의외로 장르 내 바리에이션도 꽤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 많은, 아니 모든 영화들 사이를 무조건 적으로 관통하는 공통된 한 가지 단어가 있다. 바로 '낭만'이다. 뿌연 담배연기, 스산한 홍콩 밤거리가 시각을 가득 채우고 빗발치는 총성이 청각을 깨웠으며 가끔은 찌든 땀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기도 했던 그 영화 속에는 우정이 있고 사랑도 있으며 필연적으로 배신도 있지만 이를 넘어서는 의리가 있다.


2.

영화 <영웅본색>

 좋아하는 홍콩 느와르 영화는 각자 다를 수 있으나, 대표작이 영화 <영웅본색>이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글라스를 쓰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주윤발이 성냥을 입에 물고 지폐를 태워 담배를 피우며, 쌍권총을 휘갈기는 모습은 <영웅본색>의 정체성에 가깝다. 아주 어릴 적, 티비에서 본 그 주윤발의 모습은 머릿속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촌스럽지만 낭만이 살아 숨 쉬는 소위말해 그 '간지'는 주윤발이 연기한 마크가 가장 아이코닉한 중화권 영화 캐릭터라는 말에 공감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3.

 그보다 한참 뒤, <영웅본색>을 다시 본 적이 있다. 영화 별점 관리 어플에 별점을 등록하려고 보니 너무 어릴 적에 봤기 때문에 제대로 별점을 매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말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별점을 등록하지 않은 영화들이 많이 있는데, 그 영화들에 앞서 굳이 <영웅본색>을 다시 보며 별점을 주겠다 생각한 이유는 아무래도 주윤발 때문이리라.


4.

영화 <영웅본색>

 다시 감상한 영화가 날 놀라게 한 것은 의외의 지점이었다. 내가 <영웅본색>을 볼 때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주윤발이었다. 깔끔한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난사하는. 그런데 정작 주윤발은 극 중 1/3 지점 정도까지만 그런 모습을 유지한다. 나머지 2/3 정도는 구질구질하게 살다 옛 동료를 만나며 부상으로 인해 발을 절고 복장이야 뭐, 두말할 것도 없다. (겉모습과는 별개로 어쨌든 끝까지 멋진 의리남인긴 하다)


 내가 한평생 <영웅본색>이라는 영화 제목만 들어도 반사적으로 떠올렸던 주윤발은 30분 남짓한 시간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영웅본색>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꼭 언급하는 것이 극 초반부의 주윤발이다. 난 왜 더 많은 시간을, 그리고 내용상 더 중요한 지점을 차지했던 나머지 60분의 주윤발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일까.


5.

 우리는(적어도 나는) 과거를 미화한다. '대체 내가 왜 그랬지'라며 머리를 쥐어뜯던 수많은 밤들이 지나고 난 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다. 생각해 보면 과거를 미화한다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닌 것 같다. 남기고 싶은 좋은 기억만 남겨두면 시간에 따라 알아서 숙성되어 부드럽게 연화된 감정만 남으니. 좋았던 기억만 취사선택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기억을 선택한다는 것이 본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남기고 싶냐'에 가까운 것 같다.


6.

영화 <영웅본색>

 <영웅본색>을 지금 처음 접한 관객들은 촌스러운, 구닥다리 감성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때, '세련됐다'라는 말을 떠올리지는 않지 않는가. 2023년 현시점에서야 제작 편수만 봐도 알 수 있듯, 홍콩 느와르 장르는 말라비틀어졌다 봐도 무방할 정도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시절의 낭만이 관객들 마음속에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홍콩 느와르에 대한 기억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홍콩 느와르와 낭만이라는 말을 연결 짓는 것도, <영웅본색> 속 주윤발의 30분을 기억하는 것도 사람들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미화 과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홍콩 느와르의 낭만'과 '주윤발의 30분'은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에 남기고 싶었던 요소 들이었겠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웅본색> 속 마크가 실제 극 중 마크의 지극히 일부분이었다는 것은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아주 강력한 모습이었다는 뜻이니, 어쩌면 그만큼 아이코닉한 캐릭터였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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