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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Aug 12. 2023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시인이 됐었으니까

2023_37. 영화 <생각의 여름>

1.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가장 열심히 활용하는 기능은 메신저도, 게임도, 유튜브도 아닌 바로 메모장이다. 여러 차례 작은 수첩과 볼펜을 들고 다니며 생각나는 찰나의 아이디어를 적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디지털의 안락함에 익숙해진, 아니, 더럽혀진 몸이었기에 끄적거림을 위해 손을 무겁게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냥 흘려보내는 생각들이 아쉬워 부차적으로 사용해 본 것이 스마트폰 메모장이었다.


영화 <생각의 여름>

 메모장에는 여러 폴더들이 있다. 간혹 엉뚱한 꿈을 꿀 때 잊기 전 얼른 '꿈' 폴더에 들어가 허겁지겁 기록해 놓기도 하고, 여느 TV 프로그램처럼 '알아두면 쓸데없는' 여러 잡지식들을 모아두는 '알쓸신잡' 폴더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심각하게 부족한 것이 문해력, 어휘력이랬나, '단어 수집'이란 폴더 속 적재적소에 끼워놓을 단어들을 적어놓기도 한다. 한 번 적으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흔적조차 사라지는 그 메모들을 다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지만,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애틋하게 사용하는 폴더는 따로 있다. 바로 '시'와 '창작' 폴더다.


2.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끔 감수성에 젖을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 그 감성이 꽤나 지독해 간혹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 때가 있는데, 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의외로 중요한 지점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 있을 때조차 이를 꽁꽁 싸매고 있기란 고역이지 않겠는가.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시' 폴더다.


영화 <생각의 여름>

 서점에 들를 때면 시집 코너를 한 번씩 둘러본다. 사실 시집은 서점 내에서 인기 있는 코너라고 말하긴 힘들다. 때문에 매번 갈 때마다 같은 책들을 둘러보는데 그럼에도 한 번씩 훑어보며 혹시나 지난 방문 때 보지 못하고 지나친 시집이 한 권 있지 않을까, 열심히 눈을 굴려본다. 숱한 안구 운동 끝에 시집을 한 권 발견해 계산을 마친 뒤, 본격적인 시집 탐사를 시작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미션은 꽤 그럴듯한, 마음에 드는 시를 한두 개 찾아 '시' 폴더에 적어두는 것이다.


3.

 한 번씩 혼자 감상에 젖을 때, 아니면 술이라도 한 잔 마실 때, 바늘로 단 한 번만 찔러만 주면 터질 것 같은데 그 결정적 한 번이 없어 답답할 때, 그때 '시' 폴더에 들어가 내가 쌓아둔 글귀들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한다. 글을 외우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몇 번 읽어봤다고 눈에 꽤나 익숙하게 들어오는 그 예쁜 문구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쓴 시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 맞춤형 시집인 것이다.


영화 <생각의 여름>

 영화 <생각의 여름>의 주인공 '주현실'은 시인 지망생이다. 공모전 마감은 코앞인데, 마지막 딱 한 편이 써지지 않는다. 집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산 따라 길 따라 마음 가는 곳 따라 걸어 다니며 어떻게든 영감을 얻어보고자 한다. 영화 속 현실이 쓴 것으로 나오는 시는 황인찬 시인이 직접 쓴 시다. 아마 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 속 등장하는 「무화과 숲」이라는 시가 바로 『구관조 씻기기』에 수록된 시로,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시다.


 당연하게도 내 '시' 폴더에도 황인찬 시인의 시가 몇 편 들어가 있다. 앞서 이야기 한 「무화과 숲」은 당연히 가장 먼저 기록된 황인찬 시인의 시였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시집 『희지의 세계』에 수록된 「종로사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시 아닐까 생각한다.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라는 첫 구절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직감했다. 이 시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간혹 한번 훑기도 전에 이미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는 시들이 있다.


4.

영화 <생각의 여름>

 <생각의 여름> 속 현실처럼 영감을 잃을 때가 간혹 있다. 물론 현실처럼 시인 지망생, 공모전 준비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영감을 하나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럴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창작' 폴더다. '시' 폴더를 통해 감성을 채웠다면 그 채운 감성을 어딘가 풀어놓을 곳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뭘 의도한 것인지 짐작도 불가능한 끔찍한 문장 구사력이나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는 촉촉하다 못해 푹 절여진 감성에 내가 쓴 글임에도 가끔 질색할 때가 있지만, 어쨌든 번뜩 떠오른 단어 묶음을 어딘가 적어놓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심지어 가끔 운동삼아 가볍게 입고 집 근처를 뛸 때에도 뭔가 그럴듯한 생각이 번뜩 들면 그 자리에서 멈춰 '창작' 폴더에 적어두곤 한다.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내가 그 문장들을 언제 어떻게 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 글들을 엮어 세상에 내보일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한 문장 한 문장 손 끝으로 쓸어내리며 이 문장은 언제, 이 문장은 어디서 태어났는지 반추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때까지 '창작' 폴더는 끝없이 업데이트될 것이다.


5.

영화 <생각의 여름>

 현실이 그 공모전에 붙었는지, 시인이 되었는지 알 방법은 없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관계에 대해, 과거에 대해, 경험에 대해 다시금 마주하며 어쨌든 시를 완성했다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 '시' 폴더에 있는 황인찬 시인의 시를 볼 때면, 황인찬 시인에게 느끼는 감사함과 동시에 현실을 한 번씩 생각한다. 영화 속 캐릭터지만 황인찬 시인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현실에게도 감성을 빚지는 느낌이 있다. '창작' 폴더에 있는 내 글이 언젠가 누군가의 감성을 채워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헛된 꿈을 꾼다. 오늘도 누군가의 현실이 될 그 문장 모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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