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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Aug 17. 2023

언어는 곧 권력이다

2023_38. 영화 <9명의 번역가>

1.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물론 사람마다 다른 논리를 펼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한 답은 바로 '언어'다. 손짓 발짓이 아닌 명확한 지칭을 통해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 인류 문명이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2.

영화 <9명의 번역가>

 역사책을 훑어보며 인류 역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결국 지배하려는 권력자와 저항하려는 피권력자 사이의 억압과 투쟁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농사라는 것을 짓기 시작하고 잉여 생산물이 생긴 이래로 인류 역사에 있어 계급은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꽤 오랜 시간, 아니, 거의 모든 인류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존재했던 신분제도는 그보다 4천 년 가까이 뛰어넘은 1894년에 와서야 없어지지 않았는가. 물론 신분제도의 필연성이나 옳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사회구조를 유지하는데 권력이라는 것이 사용되었다는 의미다.


3.

 권력이라는 단어부터가 '힘'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권력자들이 힘을 가지기 위해선 도구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1대 1로 붙어 이기는 사람이 대장'과 같은 방식으로는 그들이 가진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 다들 알다시피 계급이 처음 발생한 청동기 시대 때, 권력자들이 사용한 도구는 물리적인 무기였다. 물론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9명의 번역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고차원적으로 발전하고, 권력자들은 무기를 넘어선 무언가 교묘한 도구들을 찾기 시작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간극을 넓힐 수 있는 것,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다른 이들이 절대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것, 이를 통해 지배층 커뮤니티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 바로 언어다. 분화된 언어는 이제 그 자체로 힘이 된다.


4.

 언어의 역사를 권력의 역사라 할 수 있을지,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언어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자. 한자를 알아야만 고위 관직에 올라갈 수 있었다. 애초에 한자만 덕지덕지 쓰여있는 종잇장 따위, 읽을 수도 없는 민중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영화 <9명의 번역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중세시대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힘이었다.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일까, 중세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서도 라틴어를 공식 언어 중 하나로 사용하던 나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영어를 아는 것이 힘이다. 과거처럼 '지배계층으로 올라서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언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어는 현재 전 세계 유일무이한 링구아 프랑카다. 현재뿐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유일의 링구아 프랑카다.


말 안 통하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자. 그곳이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대가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우리는 말이 안 통하면 영어를 사용한다. 사실상 지구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현재,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어와 더불어 영어를 배워야 하지만, 영어가 모어인 사람들은 사실상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영화 <9명의 번역가>

 전 세계 지식 중 70%가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영어를 알면 전 세계 지식의 70%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의미다. 조금 억지긴 하지만, 영어를 하지 못한다면 70%에 가까운 지식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다, 언어는 곧 힘이다.


5.

 영화 <9인의 번역가>는 제목 그대로 각기 다른 언어를 할 줄 아는 9명의 번역가가 한 공간에 갇혀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영화다. 여기서 기본이 되는 언어는 (프랑스 영화니 당연하게도) 프랑스어다. 번역가들이 다루는 언어는 각각 그리스어, 덴마크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포르투갈어다.


영화 <9명의 번역가>

 잘 쌓아 올린 후더닛 장르의 긴장감을 다소 맥 빠지게 소진시켜 버린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후더닛 장르의 긴장감보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 즉 언어였다. 9명의 번역가들은 완전한 밀실에 갇힌 상태며 무기를 들고 있는 것 또한 그들이 고용한 출판사 편집자 에릭과 그 하수인들이다.


 완벽하게 약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단 한 번의 반격을 위해 꺼내든 것은 언어였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에릭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 그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해 반격 계획을 세운다. 반격 대상인 에릭 바로 앞에서. 하지만 에릭은 그들의 계획을 알아듣지 못한다. 또 한 번, 타이밍을 잡기 위해 카운트하며 그들은 에릭이 알아듣지 못할 중국어를 사용한다.


영화 <9명의 번역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에릭이지만, 언어를 가지지 못했기에 그는 중요한 순간에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뭐,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중국어를 구사한 것은 번역가들의 패착이었다. 에릭이 중국어 숫자를 셀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번역가들의 카운트를 알아듣고, 이때 전복된 권력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왜? 에릭이 총을 쏴서? 하수인들이 옆에 있어서? 그들을 가뒀기 때문에?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에릭이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6.

영화 <9명의 번역가>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비단 영어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엔 지배층이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가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시스템 요소 중 하나였다면, 지금은 언어 자체보다는 콘텍스트를 설계하고, 이를 얼마나 '교묘하게' 구체화하느냐로 그 무게추가 옮겨져 있다. 꽤 오랜 시간 신분 제도가 이어졌고, 법적으로 신분제가 없어진 지금도 우리는 사회 구조에 보이지 않는 어떤 벽이 없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사회 구조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따위의 급진적인 구호 따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관심도 없다) 다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언어는 곧 힘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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