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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Sep 09. 2023

편지는 우정을 싣고

2023_41. 영화 <84번가의 연인>

1.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인생을 초기화할 기회를 갖는다. 그렇다, 군대 이야기다. 고작 20년 남짓 살아놓고 뭐가 그렇게 팍팍했는지, 어쨌든 나 또한 인생을 한번 초기화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입대했다. 사회 있을 때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네댓 명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SNS도 거의 하지 않았기에 그 몇 안 되는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나를 찾기 위해 군부대까지 찾아오는 이 또한 없었다. 최대한 적게,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죽었나 살았나 잊힐 때쯤 그 가지고 간 너댓 개의 연락처에서 골라 번갈아가며 연락하곤 했다. 뭔가 일반적인 상황과는 반대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명이 원할 때만 연락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철저히 일방적인 관계가 된 것이다.


영화 <84번가의 연인>

 이렇듯 최대한 연락을 절제하며 살던 와중에도 꾸준히 했던 것이 있으니, 바로 편지였다. 지금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 당시는 스마트폰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뭐랄까, 디지털 사춘기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말도 안 되는 병을 앓다 군대에 가니 오히려 마음도 편했고, 무엇보다 훈련병 때 유일하게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편지는 내 디지털 사춘기를 위로해 주는 최적의 매체였다.


2.

 보통 편지는 훈련병을 수료하면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어쨌든 전화도 가능했고, 소위 '싸지방'으로 불렸던 '사이버 지식 정보방'을 통해 인터넷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태여 편지를 보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상병이 되어서까지 한 번씩 외부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받는 이가 좋아했을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쓰는 나는 일단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영화 <84번가의 연인>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다. 독립영화 제작 현장을 몇 번 다녀온 친구 한 명이 '나는 영화를 해야겠다'라며 이야기한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가족들이 보내준 택배로 받은 한 영화 잡지에 특선으로 실린 '각 분야 유명인들이 뽑은 영화 BEST 몇' 그런 주제의 꼭지를 몽땅 옮겨 적어 편지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현재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그 편지를 기억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살면서 수 없이 겪을 영화 관람이라는 경험 속 단 한 번쯤은 그 편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지 않을까?


3.

영화 <84번가의 연인>

 영화 <84번가의 연인>은 제목 그대로 편지를 통해 이어진 인연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이어진 인연'이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이 얼굴 한번 보지 않았지만 사랑을 느끼는 그런 인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순수한 우정'을 의미한다. 가난한 작가 헬레인은 읽고 싶은 책을 싸게 구하기 위해 여러 서점을 둘러보다 저 멀리 영국 84번가에 있는 한 서점에 편지를 보낸다. 그곳의 주인 프랭크는 헬레인에게 값싸게 고전들을 제공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어 나간다.


영화 <84번가의 연인>

 영화는 50년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 뒤 긴 시간 동안 연락하고, 친밀감을 느끼며 각자의 삶에 소중한 인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둘이 오로지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충분히 만날 수 있었음에도, 심지어 다른 방법을 통해 서로의 얼굴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한다.


4.

 같은 원거리 통신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전화와 다른 특징을 가진다. 편지는 동시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화는 두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를 주고받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된다. 반면 편지는 일방적이며 즉각적인 피드백 또한 없다. 어디까지나 혼자 길게 이야기를 늘어뜨려야 하며, 물리적인 이유로 오랜 기간 답장을 기다려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전화가 더 진보된 통신매체라 볼 수 있고 기술적인 측면만 생각하면 그 의견이 당연히 맞지만,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84번가의 연인>

 활자가 가진 힘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며 담은 진심이 있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며 몇 번이고 수정하는 정성이 있다. 즉각적인 피드백 또한 없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오히려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음성은 듣는 순간 휘발되지만, 활자는 두고두고 읽게 되는 영속성을 가진다. 기술적으로는 전화가 더 진보된 통신매체일지 몰라도 감성적으로는, 관계적으로는 편지가 더 훌륭한 통신매체라는 뜻이다. 만일 <84번가의 연인>의 배경이 2020년대고, 그들이 스마트폰 메신저로 소통하게 되었다면, 둘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 끈을 놓지 않고 소통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5.

영화 <84번가의 연인>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난 편지가 가진 힘을 믿어, 우리 이제 편지로만 소통하자'라는 말을 꺼내면 미친 사람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스마트폰을 너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그때 그 군인이었던 나처럼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면 영화에 관심을 가진 친구에게 '죽기 전에 봐야 할 100가지 영화' 따위의 이름 모를 웹페이지 링크를 보내겠지만, 편지를 쓰는 나라면 유명인들이 추천한 영화 목록을 꾹꾹 눌러가며 적어 보내줄 테니까. 그리고 그게 더 행복한 관계를, 그리고 더 오래 지속될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연락 방식이라고 믿으니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7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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