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41. 영화 <84번가의 연인>
1.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인생을 초기화할 기회를 갖는다. 그렇다, 군대 이야기다. 고작 20년 남짓 살아놓고 뭐가 그렇게 팍팍했는지, 어쨌든 나 또한 인생을 한번 초기화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입대했다. 사회 있을 때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네댓 명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SNS도 거의 하지 않았기에 그 몇 안 되는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이 없었고, 당연하게도 나를 찾기 위해 군부대까지 찾아오는 이 또한 없었다. 최대한 적게,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죽었나 살았나 잊힐 때쯤 그 가지고 간 너댓 개의 연락처에서 골라 번갈아가며 연락하곤 했다. 뭔가 일반적인 상황과는 반대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명이 원할 때만 연락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철저히 일방적인 관계가 된 것이다.
이렇듯 최대한 연락을 절제하며 살던 와중에도 꾸준히 했던 것이 있으니, 바로 편지였다. 지금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 당시는 스마트폰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뭐랄까, 디지털 사춘기에 가까웠던 시기였다. 말도 안 되는 병을 앓다 군대에 가니 오히려 마음도 편했고, 무엇보다 훈련병 때 유일하게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편지는 내 디지털 사춘기를 위로해 주는 최적의 매체였다.
2.
보통 편지는 훈련병을 수료하면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어쨌든 전화도 가능했고, 소위 '싸지방'으로 불렸던 '사이버 지식 정보방'을 통해 인터넷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태여 편지를 보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상병이 되어서까지 한 번씩 외부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받는 이가 좋아했을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쓰는 나는 일단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다. 독립영화 제작 현장을 몇 번 다녀온 친구 한 명이 '나는 영화를 해야겠다'라며 이야기한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가족들이 보내준 택배로 받은 한 영화 잡지에 특선으로 실린 '각 분야 유명인들이 뽑은 영화 BEST 몇' 그런 주제의 꼭지를 몽땅 옮겨 적어 편지로 보냈다.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현재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그 편지를 기억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살면서 수 없이 겪을 영화 관람이라는 경험 속 단 한 번쯤은 그 편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지 않을까?
3.
영화 <84번가의 연인>은 제목 그대로 편지를 통해 이어진 인연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이어진 인연'이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이 얼굴 한번 보지 않았지만 사랑을 느끼는 그런 인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순수한 우정'을 의미한다. 가난한 작가 헬레인은 읽고 싶은 책을 싸게 구하기 위해 여러 서점을 둘러보다 저 멀리 영국 84번가에 있는 한 서점에 편지를 보낸다. 그곳의 주인 프랭크는 헬레인에게 값싸게 고전들을 제공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어 나간다.
영화는 50년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 뒤 긴 시간 동안 연락하고, 친밀감을 느끼며 각자의 삶에 소중한 인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둘이 오로지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충분히 만날 수 있었음에도, 심지어 다른 방법을 통해 서로의 얼굴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한다.
4.
같은 원거리 통신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전화와 다른 특징을 가진다. 편지는 동시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화는 두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를 주고받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된다. 반면 편지는 일방적이며 즉각적인 피드백 또한 없다. 어디까지나 혼자 길게 이야기를 늘어뜨려야 하며, 물리적인 이유로 오랜 기간 답장을 기다려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전화가 더 진보된 통신매체라 볼 수 있고 기술적인 측면만 생각하면 그 의견이 당연히 맞지만,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활자가 가진 힘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며 담은 진심이 있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며 몇 번이고 수정하는 정성이 있다. 즉각적인 피드백 또한 없기에 상대방의 입장을 오히려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음성은 듣는 순간 휘발되지만, 활자는 두고두고 읽게 되는 영속성을 가진다. 기술적으로는 전화가 더 진보된 통신매체일지 몰라도 감성적으로는, 관계적으로는 편지가 더 훌륭한 통신매체라는 뜻이다. 만일 <84번가의 연인>의 배경이 2020년대고, 그들이 스마트폰 메신저로 소통하게 되었다면, 둘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 끈을 놓지 않고 소통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5.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난 편지가 가진 힘을 믿어, 우리 이제 편지로만 소통하자'라는 말을 꺼내면 미친 사람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스마트폰을 너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그때 그 군인이었던 나처럼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면 영화에 관심을 가진 친구에게 '죽기 전에 봐야 할 100가지 영화' 따위의 이름 모를 웹페이지 링크를 보내겠지만, 편지를 쓰는 나라면 유명인들이 추천한 영화 목록을 꾹꾹 눌러가며 적어 보내줄 테니까. 그리고 그게 더 행복한 관계를, 그리고 더 오래 지속될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연락 방식이라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