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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Sep 17. 2023

금손들은 직업병도 남다르다

2023_42. 영화 <잠>

※ 스포일러 주의


1.

 대학생 시절, PPT를 꽤나 그럴듯하게 만들던 친구가 있었다. 모든 수업이 발표로만 이루어진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타 과들보다 한두 번 정도 더 발표 준비를 했어야 했던 과 특성상 그 친구의 능력은 더더욱 빛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 <잠>

  언젠가 우연찮게 그 친구와 조별과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파트를 나눠 함께 만들긴 했지만, PPT 제작을 주도한 것은 그 친구였다. 우리는 (왜 그런 컬러를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짙은 노란색과 회색이 섞인 칙칙한 컬러감의 PPT를 만들었다. 축 쳐지는 디자인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름 발표하는데 큰 무리가 없는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2.

 이후 본격적으로 여러 수업들을 들으며 PPT를 제작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안타깝게도 늘지 않은 것은 내 전공 지식뿐만이 아니었다. 촌스러운 미적 감각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뭘 쓰든 직접 만든 것보다야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져 무료 템플릿을 구해봤지만 쓸데없이 눈만 높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나온 답은 전번에 만들었던 그 칙칙한 PPT였다.


영화 <잠>

 아무리 축축 쳐진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만든 PPT보다 낫다는 냉철한 판단. 결국 그 PPT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내가 졸업할 때 들었던 그 마지막 수업에서까지 활용되었다. 매번 고치고 고쳐 나중에는 원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지경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 PPT는 내 대학 생활과 발표 수업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3.

 대학 졸업 후, 한동안 내 인생에 PPT 제작은 없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딱히 직접 발표 같은 것을 진행할 일이 없었으니. 발표 자료를 만들 때보다는, 간단하게 사진을 이어 붙이거나 도형 몇 개를 삽입해 로고를 만든다거나 할 때, 사진 편집 툴로 사용한 경우가 더 많았으나 그나마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직접 PPT를 만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발표 자료에 들어갈 몇몇 이미지들을 제작할 일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PPT 작업이었기에 단축키조차 잊어버린 상황이었다. 하나하나 떠듬떠듬 기능 버튼을 찾아보는 마우스질 끝에 어느 정도 감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나에게 PPT 제작이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4.

영화 <잠>

 영화 <잠>은 정말 오랜만에 흥미를 느끼면서 봤던 한국 공포영화였다. 주연을 맡은 정유미, 이선균 배우의 연기야 두말할 것 없지만, 그럼에도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받아온 비싼 부적을 아무렇지 않게 구겨버리는 인물에서 남편의 몸에 귀신이 들었다는 집착에 젖어 온 집안을 부적으로 도배해 버리는 인물로 변해가는 수진이라는 인물에 아주 그럴듯한 개연성을 불어넣은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정유미 배우의 연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5.

 극 중 수진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퇴원하고 나서도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어 아랫집 사람을 납치, 감금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기 위해 그녀가 한 행동은 현수에게 보여줄 PPT를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었다.


영화 <잠>

 앞서 PT 자료를 만드는 장면들이 꾸준히 나오긴 했지만,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까지 발표 자료를 준비하다니, 사실 그녀가 겪은 진짜 광기는 귀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설득을 위해 발표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는 일종의 직업병이지 않았을까? 사실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낄 부분은 그녀의 발표 준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실 '믿음과 집착'이 아니라 '현대 직장인들이 겪는 집단 병리'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해본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59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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