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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Oct 07. 2023

빨간 약을 먹은 순수한 영혼

2023_45. 영화 <신세계>

1.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네오에게 건넨다. 파란 약을 먹으면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원래 살던 가짜 인생을 사는 것이고,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어 끝까지 가게 된다. 당연히 네오는 빨간 약을 먹었을 것이다. 안 그러면 영화가 진행되지 않으니까.


영화 <매트릭스>

우리네 인생 모두 어느 한 부분에선 매트릭스 속을 거닐고 있다. 그게 큰 세상이든 작은 세상이든 어쨌든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실을 깨닫는 일이란 참 충격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진실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어떤 한 세상의 이면을 보게 된다는 것이니까.


2.

 어떤 바람이 들었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대학 신입생 시절, 동기 몇몇과 함께 영화 <신세계>에 푹 빠졌던 적이 있다. 물론 흥행도 잘 되고, 많은 팬들을 보유하며 지금까지 회자되는 영화인 것은 맞지만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세계>에 대한 사랑은 좀 유별났다.


영화 <신세계>

 그렇다고 내가 영화 <신세계> 개봉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개봉날 극장으로 달려 나가 봤다거나, 무대인사를 보기 위해 저 멀리 기차나 버스를 타고 원정을 떠났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나마 진실을 털어놓자면 사실 난 영화 <신세계>에 딱히 관심이 있진 않았다. 여태까지 충분히 많이 봤는데 구태여 칼로 사람 쑤시는 영화를 한 번 더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있었고 같이 보자던 친구와의 약속이 틀어지니 왠지 모르게 맘이 떠난 느낌도 있었기 때문이다.


3.

 유난히 <신세계>를 좋아했던 친구 한두 명은 시큰둥한 나에게 영화 <신세계>를 소개해주고 싶었나 보다. 그들은 '언제 시간 날 때 한번 봐라'라는 온건한 제안을 시작으로 '이건 네가 살면서 꼭 봐야 하는 영화다'라며 슬슬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더니, '아직도 <신세계>를 안 보다니, 넌 영화인도 아니다'라는 왠지 안 보면 큰일이라도 날 듯한, 엄청난 타이틀을 뺏길 듯한, 그런 으름장으로 이어졌다. 웃기지 않는가, 그때도 지금도 난 영화인이 아닌데.


영화 <신세계>

 굳은 철학을 가지고 미뤘던 영화는 아니었기에 <신세계>를 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재밌게 잘 본 것은 맞지만 그렇게까지 열광할 영화까지였나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신세계> 팬이었던 동기 덕분일까, 영화 <신세계>는 우리 사이에서 '잘 만든 상업영화'의 정형으로 취급되었다. 나도 자연스레 영화 <신세계>를 기준으로 우리가 함께 본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친구들의 세뇌였던 것 같기도 하고.


4.

 이 모든 이야기는 굉장히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겪어봐서 알겠지만, 스무 살은 짧고 모든 순간이 찰나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일들도 그 당시에는 하나하나 모두 임팩트 있는 일들이고, 그 짧은 찰나 동안 임팩트 있는 일들을 수 없기 겪다 보면 하나의 사건이나 기준을 길게 끌고 갈 수 없다. <신세계> 또한 스무 살의 숱한 사건들 사이에 묻혀 소리소문 없이 흘러갔고,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십 년은 넘게 지난 듯이 스무 살을 회상하며 술잔을 기울일 때쯤 '아 그때 우리 그 영화 재밌게 보았는데' 정도로 언급되는 추억의 영화가 되었다.


5.

 영화 <신세계>를 다시 꺼내본 것은 3년 뒤, 그러니까 스물셋의 봄이었다. 당시는 말 그대로 '뻔질나게' 집 앞 극장에 가며 군대에서 모아 온 돈을 모조리 영화 감상에 쏟아부었는데, 관심 없는 드라마 극장판 마저 다 보고 나니 이제 재개봉 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한 멀티플렉스 사에서 특정 주제를 가지고 옛 영화들을 관에 걸었고 그날 상영작으로 올라간 영화는 바로 <무간도>였다.


영화 <무간도>

  왜 그때서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일까, 영화 <신세계>와 <무간도> 사이의 닮은 점들이. 그 두 작품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왜 두 영화를 연결하고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생각해 보면 스무 살 당시에도 <신세계>를 언급할 때 항상 꼬리말처럼 <무간도>를 함께 언급하곤 했었는데 왜 그 기억만 쏙 빠져있다가 이제야 그 대화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일까. 참 사람 기억이라는 것이 얄팍하다.


6.

 이때부터였을까,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 스물셋의 봄 이후로는 확실하게 영화 <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영화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곤 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문화 장르라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장르적 특성이나 그로 인한 일종의 통속성은 당연히 존재하는데 과연 우리는 이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 대한 고찰을 주고받은 것이다. 물론 대부분 한두 마디 안에 다른 농담 따먹기 같은 것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럼 어떤가, 어쨌든 과거와 다른 고찰이 시작된 것인데.


영화 <무간도>

 뭐, 당연하게도 그것에 대한 결론은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영화인'이 아니니까. 내가 뭘 안다고 영화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어쨌든 '잘 만든 상업영화의 정형'에서 '장르적 특성의 허용 범위'라는 주제의 거리만큼 나와 영화인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에게 영화 <무간도>는 모피어스의 빨간 약과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잘 만든 상업영화'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깨어나 '장르적 특성의 허용 범위'라는 이면을 마주하게 만든 그런 빨간 약. 이것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나는 네오가 되겠지. 그때는 나를 영화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9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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