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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Oct 11. 2023

오랜 시간 내가 봤다고 착각한 영화

2023_46. 영화 <타짜>

1.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새끼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묻고 더블로 가'.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씩은 다 들어봤을 법한 대사들, 그리고 이 명대사들의 향연이 이어지는 한 영화, 그렇다. 영화 <타짜> 이야기다.


영화 <타짜>

 옛말에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도박 자체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패 섞는 소리만 들리는, 서로 속 뒤집는 허세와 블러핑 속에서 뒤집는 카드 뭉치들이 주는 짜릿함은 꽤 상당하다. 양아치로 살고싶지는 않지만, 갱스터들의 구역 싸움은 꽤 흥미진진하게 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2.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의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영화 <타짜>에 푹 빠져 지냈었다. 친구들과 극 중 곽철용이 뱉는 대사들로 농담 따먹기도 하고, 글씨를 쓰든 뭘 하든 아무튼 꼼지락 꼼지락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친구만 보면 손목을 꺾고 '구라치다 걸리면 피 보는 거 안 배웠냐?'며 하는 일을 방해하기도 했다.


영화 <타짜>

 학생 때 뿐만이 아니다. 이립에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도 친구들과 그런 장난을 치며 놀기도 한다. <타짜> 개봉이 2006년이니 이런 짓을 하고 산 지도 벌써 17년이 됐다. 그렇다. 17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타짜>는 단 한번도 내 인생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아직도 <타짜>를 처음 본 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타짜>를 처음 본 게 사실 채 몇 년 되지도 않았으니까.


3.

 가끔 너무 유명한 영화들, 너무 평이 좋은 영화들은 그냥 보기 아까울 때가 있다. 정말 재밌는 영화라고 하니, 괜히 그 영화의 재미를 100% 소화할 수 있을 때 보고싶은 것이다. 욕심이야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완벽의 컨디션' 내지는 '최상의 몸상태'를 기다리며 차일피일하다 결국 잠 안오는 새벽에 꾸벅꾸벅 졸며 영화를 보곤 한다. 오히려 다른 영화를 볼 때보다 더 안좋은 상황에서 보게 되니 100%는 커녕 영화가 가진 재미의 반의 반 정도만 겨우 느끼고 마무리 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타짜>

 피일차일 하는 영화들 중 굳이 어떤 컨디션을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유로 '감상해야지'라는 생각조차 않고 있다 정말 뜬금없는 길로 빠질 때가 있다. 보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자주 접하다보니 '내가 그 영화를 봤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일상생활 속 깊게 스며들어 함께하는 영화가 있다. 그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지나다 보니 영화 감상 여부는 흐릿해지고 이곳저곳에서 접한 정보들만 남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 스스로도 '내가 그 영화를 봤었나'의 수준에 들어서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가 흔한 상황이 절대 아니다. (이런 상황이 꽤 흔하게 일어난다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단지 우연찮게 <타짜>가 '기억이 왜곡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어린 시절에 공개된 작품 한 개'였을 뿐이다. 어느 순간 문득 '나는 <타짜>를 본 적이 없다'라며 깨달은 순간, 그 충격과 허망함이란.


4.

영화 <타짜>

 <타짜>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오래 전에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감상을 계속 미루었다. 재밌는 영화로 워낙 정평이 나있다 보니 또 다시 '100% 컨디션'을 찾으며 미루기 시작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갈 수록 할 일은 많아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100% 몸상태를 회복하는 날은 줄어든다. 결국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타짜>를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날은 '잠 안오는 새벽'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타짜>가 가진 재미의 반의 반만 느끼며 겨우 감상을 마칠 수 있었다. 훗날 '제대로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재감상 했지만 처음 봤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첫 감상의 설렘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5.

영화 <타짜>

 극 중 고니는 말한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그렇다. 영화 <타짜>는 나에게 '확실하지 않은' 영화였고, '승부를 걸지 마라'는 고니의 말과는 반대로 너무 당연히 '봤다'에 베팅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허튼 베팅을 보니, 새삼 도박은 하면 안되겠다 생각한다. 뜬금없는 결론이긴 하지만 어쨌든 도박을 다루고 있는 영화를 통해 얻은 교훈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 괜찮은 결론일지도.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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