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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Oct 22. 2023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주는 가혹한 희망이란

2023_47. 영화 <화란>

1.

"거기는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산대요"

"그런 데가 어딨냐, 있으면 내가 갔지"


 이 대화는 연규와 치건, 두 인물과 영화 전체를 꿰뚫는다. 두 인물 모두 모든 사람이 비슷하게 사는 곳에 가고 싶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욕구를 대한 태도에서부터 두 사람의 입장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차이를 동력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위 대사에는 믿음과 포기가 양립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 <화란>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에 대한 욕구를 끝까지 쥐고 있는 사람과 이내 놓아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2.

영화 <화란>

 영화는 계속하여 무언가를 유리한다. 동시에 보관하며, 가둬둔다. 태어나 외부로 나가본 적이 없는 연규와 치건은 명안시 안에 갇혀있다. 연규는 명안시 안에서조차 또 다시 집에 갇힌다. 그 집은 가족이 있는 가정집과 치건과 함께 일하게 된 사무실을 포함한다. 연규와 치건은 또 다시 사각 상자 속에 무언가를 담아둔다. 그 상자 속에는 각각 명안시와 화란(네덜란드)이 담겨있다.


 연규는 상자 속에 여러 풍차 사진들과 그곳으로 떠나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뒀던 돈들을 담아둔다. 즉, 화란을 담아둔다. 그가 상자 속에 담아 뒀던 것은 (하얀의 표현처럼)연규만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세상에서 벗어날 키와 같다. 키 없이 달릴 수 없는 오토바이와 같이 그의 삶은 화란으로 대표되는 동네의 바깥을 넘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이상향이기 때문에.


3.

 반면, 치건은 낡아 녹슨 낚시 바늘을 담아둔다. 한번 죽어버렸던 치건을 이 세상 속으로, 그리고 어두운 밑바닥 속으로 다시 끌어다 놓은 그 낚시 바늘이다. 치건이 상자 속에 담아뒀던 바늘은,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왔을 때조차 그를 다시금 세상 속으로 강력하게 끌고 들어온 타성과도 같다.


영화 <화란>

치건이 간직하고 있던 것은 밑바닥과 같은 삶을 향하고 있고, 연규가 간직하고 있던 것은 그 외부를 향하고 있다. 연규와 치건의 상자는 두 인물이 진창과 같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요컨대 꿈도, 희망도 없지만 옅게 뜬 눈으로나마 외부를 바라보는 것과, 의지를 거세하고 본인 스스로 물성을 잃고 진창과 동화되는 것이다.


4.

 그런 의미에서 명안시는 네덜란드와 의미적 대칭을 형성하고 있는 공간이다. 외적으로만 살펴보더라도 연규가 찾아보는 네덜란드는 꽃과 풍차가 가득한 공간이지만 명안시는 달동네와 폐가, 그리고 땀냄새가 가득한 공간이다. 명안시는 모두가 다르다, 교내 양아치와 연규, 학생과 동네 깡패, 건달과 소시민,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다르다. 그들 사이에는 계급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물의 말에 따르면)네덜란드는 모두가 같다.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산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명안시의 계급을 활용하여 고혈을 쥐어 짜내며 먹고 사는 두 인물은 모두가 평등한 네덜란드를 욕구한다.


5.

영화 <화란>

 어쨌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명안시를 떠났다. 치건은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명안시를 떠났다. 본인의 말마따나 이미 한번 죽은 사람인 치건에게 꽤나 버거웠을 여분의 삶을 포기한다. 연규는 하얀과 함께 명안시를 실제로 떠난다. 그들이 네덜란드로 갈 지, 아니면 또 다른 명안시로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진창에서 만나, 어디론가 떠났다. 지독하기 그지없는 세상 속에서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주는 가혹한 희망이란.


영화 <화란>

 연규가 훔쳐 타는 오토바이는 한번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키가 없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굴러가던 그 오토바이처럼 연규와 치건의 삶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키가 없이 굴러가고 있다. 동네에서 훔친 오토바이는 결국 명안시 안을 뺑뺑 주행하다 폐기된다. 결국 명안시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죽어버린 치건과 같이. 하지만 연규가 하얀과 함께 명안시를 벗어나며 탔던 오토바이까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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