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09. 영화 <포드 V 페라리>
1.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1966년, 헨리 포드 2세의 제안으로 르망 24시를 휘어잡고 있던 페라리를 잡기 위해 모인 캐롤 셸비, 켄 마일스를 비롯한 여러 엔지니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동차 경주를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영화는 그 외적인 부분들에 조금 더 시간과 정성을 할애한다. 철옹성 같던 페라리의 아성을 뚫고 르망 24시에서 우승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미션으로 언급되지만, 르망 24시는 오히려 가장 베이스로 깔리는 기본 임무 정도가 된다.
르망 24시 우승보다 중요한 것은 포드 임원진들과 현업 종사자들 혹은 각 회사의 대표 사이의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엔 너무 대놓고 견제하는) 기싸움과 로망 24시 우승을 향해 달려가며 조금씩 변해가는 엔지니어와 레이서의 성장이다. 극 중 르망 24시는 그 자체로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파워 게임과 성장의 계기를 꺼내기 위한 단초의 역할도 굉장히 크다는 의미다.
2.
미국식 전후 자본주의의 상징인 포디즘(Fordism)이라는 명칭 자체가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따왔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 포드는 분화, 그리고 전문화된 노동, 자동화된 노동을 통해 생산성을 극도로 향상한 자본주의 그 자체인 회사다. 페라리 본사로 찾아간 포드 임원진들에게 한 명의 인물이 하나의 자동차 모든 것을 담당하는 장인 정신을 강조하며 소개하는 장면은 포드와 페라리가 가진 차이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결국 효율을 따지고 회사의 이윤을 위해 레이싱을 지원했던 헨리 포드 2세는 경기 도중 헬기로 자리를 뜨고 결과 발표 이후 켄에겐 관심도 없이 우승을 차지한 맥라렌에게 달려가지만, 엔초 페라리는 경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비록 자신의 팀을 꺾었다 하더라도 유일하게 켄에게 모자를 벗으며 예를 표했다는 점은 두 회사의 차이점을 생각했을 때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실제 성격이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헨리 포드 2세와 엔초 페라리는 두 회사가 자동차를 대하는 태도만큼 차이를 둔다.
이러한 차이점은 회사 대 회사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포드 내 임원진들과 레이싱 팀 사이의 갈등에서도 드러난다. 마케팅을 위해 레이싱을 시작했기에 세일즈 지표를 올려줄 대외적인 그림이 중요한 사측과 오직 르망 24시 우승만을 위해 몰두했던 노측의 차이점은 포드와 페라리 사이의 차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포드 내 레이싱 팀들은 포드보다는 페라리에 더 어울렸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페라리 쪽에 훨씬 더 맞닿아있다.
3.
시간적 배경도, 소재가 된 인물들과 각자가 서있는 입장들도, 그리고 그 입장으로 발생한 몇몇 갈등 구조는 당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논의가 확장된다. 극 초반, 헨리 포드 2세는 자동차 공장에 들어와 돌아가는 벨트를 멈춘다. 제왕적 자본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공장 하나를 계속 돌리는 것만으로는 이윤을 극대화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들은 공장을 하나 더 늘린다. 바로 르망 24시다. 극 중 르망 24시는 결국 포드라는 거대한 회사가 회사의 이윤을 올리기 위해 새로 돌리는 컨베이어 벨트에 불과하다. 3분 30초 동안 돌아가는 둥근 코스를 24시간 동안 돌리는 르망 24시는 포드라는 결국 거대 자본 기업이 그들의 이윤을 위해 굴린 컨베이어 벨트가 된다.
그 속에서 차를 몰고 달리던 것은 찌든 기름때가 온몸에 묻어있고, 돈이 없어 차량 정비소를 압류당한 켄이다. 그리고 레이싱을 끝내는 것 또한 켄이 결정하지 못한다. 결국 회사 대표가 임원진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 임원진은 또다시 그 아랫사람을 통해 결승선을 통과할 타이밍을 결정한다. 그렇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결국 회사가 정한다. 그 이후 자본의 모든 관심은 컨베이어 벨트가 만들어낸 결과물(맥라렌)이다. 그 속에 소모되었던 노동자(켄)는 관심 밖에서 조용히 퇴근할 뿐이다.
4.
트랙 위에 올라탄 켄은 멈출 수 없다. 어쨌든 레이싱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외부에서 망치로 때려 밀어 넣고 난 후에야 문은 닫힌 상태로 고정된다. 내부에서 본 문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해 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지만, 외부에서 바라본 문은 내부의 무언가를 가둬두는 감옥이다. 벨트 위를 달리는 노동자는 망치로 스스로를 가둬둔다. 고장 나버린 GT40의 문은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의 메타포다. 극 중 배경이 되었던 1966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났다. 오늘날 GT40의 문은 누구나 여닫을 수 있도록 고쳐졌을까, 오늘날 자본주의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을까, 아직도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컨베이어 벨트에 밀어 넣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