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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un 08. 2024

그곳은 이제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2024_23.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1.

 새벽 공기를 맡으며 추억에 잠겨 대학가 근처를 한참 걸었다. 저 멀리 타 지역에 다녀온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요는 이렇다. 오랜만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친구들과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얘기를 더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솔직해지자면 거기까지 간 시간과 돈이 아까워,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마지막의 마지막 시간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느지막이 막차를 타고 살던 동네 터미널로 돌아왔는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버스는 끊겨버린 터라 택시 외의 선택지는 없었고, 이 많은 사람들이 터미널 앞에서 동시에 택시를 잡고 있으니 안 그래도 행동 굼뜬 내 몫으로 할당될 택시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평소답지 않게 유난히 사람 많은 그 북새통을 가만 보고 있자니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택시를 잡든 뭐를 잡든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어차피 시간도 늦은 거 한두 시간 더 늦으면 어떤가, 하는 생각과 오랜 시간 버스에 쪼그려 앉아있어 뻐근해진 몸을 좀 풀어줄까 하는 생각에 겸사겸사 택시가 있을 만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즐기는 느긋한 산책이었다.


2.

 밤거리를 헤매다 보니 어느새 20대 초중반 자주 다니던 그곳으로 오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 번화가였다. 벌써 졸업한 지도 꽤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추억가지를 뻗어냈다. 거리는 익숙한 구조였으나 많은 가게들이 바뀌었다.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바뀌는 데 나만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모두가 멀쩡한 세상에 혼자 돌연변이가 되어 섞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컨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혼자 적응하지 못해 뒤떨어진 내 모습이 보였다. '뭘 또 그렇게까지 멀리 가냐'는 생각도 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와 함께 그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본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리고 매일같이 그 시절의 나를 곱씹으며 멍청히 웃음 짓고 있었다.


3.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는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묘한 에너지와 블랙 코미디 요소를 치워놓고 살펴보면 젊음과 죽음에 관한 꽤 그럴듯한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미 30여 년 전 영화인지라 구시대적 사고들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긴 하지만, 그 시간적 한계를 감안한다면 그럭저럭 웃으며 볼 수 있는, 의외로 괜찮은 메시지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블랙 코미디 잔뜩 섞은 영화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느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다만 이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인물들의 대화를 찾아본다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극 중 어니스트는 불로불사 약의 효과로 거짓말처럼 치유되는 상처를 보고 홀린 듯 약을 마시려다 문득 정신을 차린다. 절대로 늙지 않는 삶을 얻을 것이라는 말에그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늙을 것"이라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며, 그것은 꿈이 아니라 악몽일 뿐"이라 얘기한다.


 이는 <죽어야 사는 여자> 전체를 꿰뚫는 메시지를 담은 대사다. <죽어야 사는 여자> 뿐만 아니라 영생을 다루고 있는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해당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대사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며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늙어가는 불로불사의 삶이 가지는 저주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4.

 과거에 대한 회구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 나는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때 그 재밌었던 언젠가, 그때 그 행복했던 언젠가를 끊임없이 추억하곤 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며 온전히 살아간 적이 나에게 얼마나 있었을까.


 나와 함께 그 과거를 경험했던 옆의 누군가는 이미 그 시간에서 벗어나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간다.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며 그 속에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나이 들어가는 모두들 사이에서 혼자 늙지 않는(혹은 철없는) 무언가로 남아 있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어릴 적 보았던 만화 삽입곡들을 일상 속 BGM처럼 틀어놓는 것도, 몇 년째 이미 사라져 버린 음식점을 추억하며 새로운 가게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것도, 남들은 '그게 아직도 나와?'라며 놀라는 게임 시리즈를 아닌 척 남몰래 즐기고 있는 것도, 이렇게 옛 추억을 더듬거리며 '그땐 그랬지'라며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거니는 것도, 어쩌면 나 혼자 흐르는 세월을 인정하지 못하고 늙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속 영생을 누리는 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 것이라면, 그런 면에서 내가 겪은 이 딜레마가 맥을 같이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가지 불쌍한 점은 영화 속 불멸자는 몸이라도 늙지 않지만, 현실 속 내 신체는 속절없이 늙어간다는 것이다.


5.

 대학 시절, 대학가 거리를 매일같이 거닐 때에도 그 거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 있는 내가 이질적인 존재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있지도 않은 과거의 골목을 한참을 걷다 기분을 넘어 혓바닥에까지 씁쓸함이 직접적으로 느껴진 이후에야 택시를 잡고 집에 돌아왔다. 그곳은 이제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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