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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소가맥 Jun 15. 2024

상실과 AI, 이미 흔한 소재를 큰 고찰없이 다룰 때

2024_24. 영화 <원더랜드>

1.

 SF 장르를 차용하고 있는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고찰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롭게 발생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고찰과 문명이 발생한 이후 늘 존재했던 보편적인 고민들에 대한 고찰이다. 전자에 대한 예시로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바이센테니얼맨> 등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이전에 없던 논쟁거리를 그럴듯하게 풀어놓아 관객들이 큰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영화 <콘택트>가 대표적일 것이다. 여기선 이미 지겨울 정도로 많이 언급된 문제들을 어떻게 SF 장르와 결합하여 새롭게 풀어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영화 <원더랜드>는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절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공적으로 풀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2.

영화 <원더랜드>

 영화 <원더랜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영상통화를 통하여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원더랜드'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다. 바이리는 자신이 죽은 후 혼자 남겨질 딸, 바이지아가 걱정되어 원더랜드 서비스를 신청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지아가 영상통화에 집착하게 되고, 바이리의 어머니는 손녀와 원더랜드 속 바이리를 떨어뜨려 놓고자 한다. 한편 정인은 코마 상태에 빠진 연인 태주를 잊지 못하고 서비스를 신청하여 원더랜드 속 태주와 일상을 함께한다. 그러던 어느 날, 태주가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고, 평화롭게 유지되던 정인의 일상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3.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이 느끼는 상실감에 대한 문제는 사실 굉장히 케케묵은 이야기다. 서사라는 것이 발생한 이후, 어쩌면 그 이전부터 우리는 사랑과 이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AI가 본격적으로 대중문화 소재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소재를 다룬 콘텐츠들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 이 영화의 소재부터 재작년 공개된 드라마 <욘더>를 비롯한 여러 콘텐츠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요컨대 <원더랜드>의 소재에 대하여 신선함을 느낄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승패는 소재의 신선함이나 새로움에 달려있기보다는 어떻게 흥미롭게 풀어나가느냐에 달려있었다.


4.

 문제는 그 '흥미로움'을 영화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과 행동들의 수가 읽힌다. 해리의 부모님이 어떤 상황일지, 바이리의 선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성준의 정체도 대충 이런 거겠지, 생각한 대로 1차원적으로 흘러간다. 신선한 소재가 아닌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안의 설정들이 지나치게 얄팍하지 않나, 생각한다.


영화 <원더랜드>

 여기에 나름 시의적절하게 끌고 들어온 AI 소재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감독이 SF 장르의 영화에 대하여 제대로 고민을 해본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특히 영화 말미, 바이리 에피소드를 보면 의문을 넘어 탄식이 나올 정도다. 2010년대 중반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볼 법한 묘사를 통해 바이리가 서비스 중앙에 접근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원더랜드 소재가 힘을 잃으니 그에 딸려 들어오는 관계들도 함께 동력을 잃는다.


5.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같은 형식의 영화들의 경우, 메인이 되는 인물을 두고 해당 인물을 위주로 극을 진행하는 것이 흔하긴 하다. 하지만 <원더랜드>의 경우, 극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지나치게 바이리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다른 인물들의 존재감 없이 묻혀버린다. 보다 다양한 상황의 딜레마를 보여주기 위하여 옴니버스 형식을 차용했겠지만, 한 커플의 이야기에 과하게 치중되니 나머지 인물들은 러닝타임 내에 끝내야 하는 이야기들을 급급하게 진행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 <원더랜드>

 함께 딸려오는 문제점은 진행이 산발적이라 것이다. 등장인물이 많아지며 영화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지는 모습은 다른 영화들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감독의 전작 <가족의 탄생>을 봤던 사람이라면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잖은 인물들이 몰려나오더라도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감독인데.


6.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관계'와 '이별',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다. 김태용 감독의 주특기에 가까운 소재들이기도 하다. 아쉬움 남은 몇 요소들 뒤, 결국 <원더랜드>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들이다. 바이리는 딸에게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하고'라며 딸에게 이야기하는데, 이는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수칙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시간을 굳건히 보내는 것이 상실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극 중 '원더랜드'는 이미 떠난 이를 현실에 묶어두는, 어떻게 보면 과거에 머무는 방식을 통해 상실의 극복을 유보하는 방식이다. 당장의 슬픔은 옅어질지 모르지만, 그 후에 오는 공허함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바이리는 자신의 죽음을 딸에게 직접 언급하며, 정인은 스스로 서비스를 해지함으로써 그 유보를 넘어선다. 결국, 상실의 극복이란 상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 곳곳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메시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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