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25.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1.
난 땀이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찝찝하고, 번거롭고, 무엇보다 냄새도 난다. 비슷한 체질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약간의 더위나 습기도 치명적이다. 그런고로 5월쯤이 되면 마음의 준비를 시작하곤 했다. 일 년 중 가장 찝찝한 몇 개월을 견뎌야 하는 그 초입이 바로 5월 중순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8월 말, 그러니까 처서가 오기 전까지의 3~4개월 남짓의 시간은 나에겐 일종의 고행과도 같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2.
많은 영화들은 여름을 꽤나 아름답고, 매력 있는 계절로 묘사한다. 당장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영화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이 많다. 영화 <맘마 미아!> 속 묘사되는 비췻빛 지중해 바다와 ABBA의 노래로 배가되는 낭만은 여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어떠한가. 주인공의 설익은 사랑을 대변이라도 하듯 여름이라는 계절은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풋내음을 내고 있다. 영화라면 응당 제공하는 시청각적 자극 외에도 베트남을 말갛게 묘사하는 여러 이미지들을 통해 촉각과 미각, 후각까지 조심스럽게 깨워주는 듯한 <그린 파파야 향기>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대만이나 일본의 청춘영화로 눈길을 돌려보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영화들이 나올 것이다. 여름 외의 모든 계절이 사라지는 마법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름 배경 청춘 스토리가 차고 넘친다.
3.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은 내가 싫어하던 것은 '여름'이지, '여름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도 충분히 좋은 영화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 배경의 영화는 사실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다. 영화는 크게 2개의 막으로 나눠진 구조를 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2부다. 흑백으로 이어지던 1부와는 상반되게, 드디어 여름의 색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2부는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이야기다.
일본으로 여행온 한국인 혜정과, 동네 토박이 유스케의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감정선을 다루고 있다. 이 감정선에 힘을 싣는 것은 바로 배경이다. 어쩌면 햇빛조차도 나른하게 비추는 여름 한가운데의 시골 동네가 형성하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두 사람 사이의 텐션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
4.
여름을 좋아해 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생각한 날이 떠오른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조용히 관람하다 문득 혼자 결심한 다짐이었다. 여태껏 왜 여름을 싫어했을까. 앞서 말했듯 단순히 땀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올까 말까 한 비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기 때문일까. 다분한 습기가 피부를 감싸다 못해 코 속을 찌르며 풍기는 약간의 꿉꿉한 냄새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름을 싫어하기에 산으로도, 계곡으로도, 그곳이 어디든 밖으로 떠나는 것이라면 나가기 전부터 웬만한 의욕들이 사라지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여름은 그 긴 기간에 비해 훨씬 단조로웠다. 나에게 여름 향기란 바닷물의 소금기 짠 냄새도 아니고, 산뜻한 피톤치드도 아니었다. 그 꿉꿉한 습기 냄새가 나에게는 여름을 대표하는 냄새였다.
5.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같은 사랑 이야기가 나에게 펼쳐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적어도 여름을 감싸 안은 내가 보는 여름 풍경은 그 영화 속 공간과 얼추 비슷한 이미지를 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많은 여름 영화를 보며 영화 속 배경을 예찬하면서도 도대체 왜 그 예찬을 나의 삶에 끌어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볼 때쯤, 단순히 '덥기 때문에'라는 이유 만으로 온 여름을 부정적인 에너지로 채워 넣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 혼자 해본 다짐이었다. 봄, 가을이 거의 사라져 버린 지금, 사실상 일 년의 반을 차지하는 여름을 좋아해 보자. 그러니까, 내 일 년의 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