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21. 영화 <그녀가 죽었다>
1.
나는 언론학을 전공했다.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듯이, 신문과 뉴스 같은 전통적인 매체만으로 언론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애초에 지나갔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공 수업 또한 다양한 채널들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는데, 당시 언급되었던 여러 채널들 중 당연하게도 SNS의 비중이 가장 높을 수밖에 없었다. SNS는 여론을 대변함과 동시에 전혀 다른 여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투명한 창인 동시에 전혀 다른 개인을 만들어내는 과시의 장이지 않는가.
지금도 그렇듯 당시에도 SNS는 따로 하지 않았기에 관련 논의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큰 감흥은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구미가 당기는 한 가지 논리가 있었다. 'SNS의 동력은 관음증과 노출증'이라는 한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말을 인용한 것인지, 교수님 혼자 간직하고 있던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꽤 공감 가는 말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2.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다른 이들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이 취미인 정태와 소위 'SNS 관종'인 소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주인공 정태의 직업은 공인중개사로, 직업 특성상 타인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점이 바로 정태가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는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권을 십분 살려 다른 이들의 집에 몰래 들어가 그들의 인생을 훔쳐본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편의점에서 주위 사람들을 훔쳐보던 정태는 소시지를 먹으며 비건 음식 사진을 포스팅하는 한소라를 보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강렬한 흥미를 느낀 정태는 그녀의 인생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3.
영화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극에 달한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앞세운다. 정태는 단순히 몰래 보는 행위를 넘어 타인의 집에 직접 숨어 들어가는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타인의 삶에 침범한다. 그는 이런 행위에 어떤 문제의식이 없다. '관음'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잘못된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나쁜 짓은 하지 않습니다'며 이야기하는 그에게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극 중 몇 번이나 반복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대사는 아마 정태가 가진 최소한의 죄의식에 대해 스스로 부여하는 면죄부일 것이다.
소라는 SNS 상 만들어진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현실을 기꺼이 던지는 사람이다. 삐뚤어진 윤리의식과 지나친 자기 연민을 토대로 쌓아온 소라의 인생은 몇몇 사건을 겪으며 소위 'SNS 관종'(이것도 착한 표현이다)으로 새로 태어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SNS 속 소라'를 위해서라면 개를 죽이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거리낌 없이 수행한다. 모든 행위는 실제 현실 속 불쌍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라는 뉘앙스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이는 정태의 '나쁜 짓은 하지 않습니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결국 본인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정도까지는'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극 중 소라가 '더 미친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정태의 행위가 조금이나마 묻혔을 뿐이다. 이렇듯 지나친 관음증과 지나친 노출증은 그들의 윤리의식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심심하면 한 번씩 보도되는 'SNS의 폐해' 뉴스 속 인물들은 스케일이 작아진 정태와 소라다.
4.
소라의 노출은 현실 속 진창인 삶을 허구로 꾸며내 아름답게 과시하며 드러내는 작업이라면 정태의 관음은 허구의 삶을 파고들어 민낯을 밝혀내는 행위다. 두 행위 사이의 연결고리는 SNS다. SNS의 동력은 노출증과 관음증이라는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이보다 더 적합한 연결고리도 없다. 하나는 SNS 내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SNS 외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반대의 목적을 지닌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 결국 두 행위의 프로세스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5.
이상적인 것은 결국 적당한 진실과 적당한 가식을 적당히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그리고 이 이미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서로 모른 척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그 적당한 선을 유지하지 못한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6.
내레이션은 극이 진행되는 가장 큰 줄기 역할을 한다. 구구절절한 변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두 인물의 내레이션을 듣고 있자니 어째서 이런 진행방식을 선택한 것인지 알 법도 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레이션에 의지하여 과하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 많다. SNS의 부작용을 다루면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여성 인권에 대한 문제도 녹이면서 스릴러라는 장르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할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다기보다는 그 주제들을 적당히 섞어내는 방식이 다소 아쉬웠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극 후반을 넘어갈수록 급급한 인상을 준다.
7.
영화의 단점을 상쇄하는 것은 결국 배우들의 몫이다. 변요한 배우의 연기야 오랜 시간 여러 영화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으며, 최근 여러 상업영화의 주연으로 극장을 찾은 신혜선 배우 또한 준수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연기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SNS의 폐해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변요한 배우 과거 작품 <소셜 포비아>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를 생각하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또 다른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