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2012)
스토리텔러, 그리고 작가
<라이프 오브 파이>는 파이의 표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어 하는 작가가 파이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체적인 구성이 액자식이라, 소년 파이가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표류하는 이야기는 모두 플래시백으로 들어있는데, 소년의 이름이 '파이'가 된 계기와 가족의 이야기부터 어떻게 호랑이와 단둘만 바다에 떠다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사건이 '파이' 씨가 들려주는 회상을 통해 전개되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히 이야기를 듣는 리스너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이를 영화에서 대변해 주는 인물이 '작가'다. 파이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려는 그는, 우선 파이의 이야기를 듣는 '리스너'이지만, 직업의 특성상 또다른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하게 되는 '텔러'이기도 하다.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인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감독, 듣는 사람을 관객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도 이 구도가 적용된다.
여기에서 왜 굳이 '듣는’ 사람의 직업을 작가로 설정했을지가 궁금해졌다. 파이와 작가에게 1차적으로 대응되는 관계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감독과 관객의 관계다. 거슬러 올라가면서 감독이 작가의 위치에 오게 되면 파이는 원작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어딘가에 '파이'가 존재한다면 파이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전달한 원작의 작가 또한 영화에서의 작가의 위치에 앉게 된다. 이렇게 듣는 위치에 있는 인물에게 창작의 능력을 부여한 것은,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기대한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이는 결말과도 관련이 있는데, "The story is up to you.(이제 이야기는 당신에게 달렸어요)"라는 대사에도 드러나듯, 텔러의 역할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서 끝나고, 이해와 해석은 듣는 이, 즉 제2의 창조자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작가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며 관객이 영화를 보는 행위와 작가가 이야기를 듣는 행위의 평행성을 체험할 수 있어서 영화의 이런 전달 방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결국은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이야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데, 스토리텔링과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주제에 잘 어울리는 마무리였다.
이성과 본능, 인간과 동물 사이
파이가 어릴 적 자신의 이름인 피신(Piscine)이 놀림받는 것이 싫어 원주율 파이(π)로 자신을 소개하고 3.14부터 숫자를 외우는 과정을 보여주면서부터 '이성'에 대한 암시가 시작된다. 소년 파이의 전체적인 모험을 보면 굉장히 영리하고 이성적인데, 동시에 그는 세 가지의 종교를 믿으며 신에게 지속적으로 호소한다. 또한 파이의 아버지는 3개의 종교를 가진 파이에게 "종교는 어둠이다, 이성을 믿어라"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이성'이란, 종교적인 신념 또는 동물적 본성의 상대개념으로 나타난다. 동물적 본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구명보트에 남게 된 파이와 리차드 파커의 구도를 살펴볼 수 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보트에 인간과 호랑이가 타있는 그림을 본다면, 인간은 이성적이고 동물인 호랑이는 본능적이므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엔딩에서 파이가 한 이야기를 통해 반전된다. 만약 파이의 두 번째 이야기대로 호랑이와 표류된 것이 아니라, 엄마, 주방장, 태국인 선원, 파이 이렇게 넷이 표류된 상황이라면 파이는 호랑이인 리차드 파커에 해당된다.
리차드 파커는 호랑이인데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사냥꾼과 서류가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불렸다고 소개되었지만, 사실 '리차드 파커'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실존 인물의 이름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름을 부여했다고 생각되는데, 간단히 실존 인물 리차드 파커에 대해 소개하자면, 파이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표류하게 된 17세 소년이다. 이 이야기는 '더들리-스티븐스'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년을 포함한 네 사람이 표류를 하게 되었고, 더들리라는 선장이 제비 뽑기로 나머지 셋을 위해 죽을 한 사람을 뽑자고 제안한다. 넷 중에는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제비 뽑기는 무산되었지만 이튿날 식량이 떨어지자 더들리는 리차드 파커를 죽였으며, 반대했던 사람도 파커의 인육을 먹으며 생존한다는 내용이다. 네 명이 난파선에서 생존해서 표류한다는 것과 배 위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상황이 영화의 내용과 겹치는데, 작가는 소년에게 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동물에게 소년 파커의 이름을 부여하며, 둘의 관계를 각각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설정했다. 그래서 영화를 여러 번 본다면,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관점에서 감상하고, 두 번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관람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을 믿겠습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봤다. 첫째로는 영화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신의 존재'와 종교에 대한 믿음에 관한 주제가 있고, 두 번째로는 앞서 언급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고민하듯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 호랑이 파커와의 표류를 믿느냐, 네 사람의 표류 이야기를 믿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 또는 작가는 결코 관객이나 독자에게 둘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않는다. 결정을 유보하고 '어떤 스토리가 더 마음에 드나요?'라는 질문으로 결정을 열어둔다. 왜냐하면 어느 쪽을 믿더라도 타당하고, 말이 되기 때문이다. 파이가 이야기를 끝마친 후에 어떤 스토리가 더 마음에 드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의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병실의 침대에서 파이가 두 번째로 들려준 이야기도 지어냈다기엔 상당히 현실적이고, 파이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태도로 보았을 때 너무 생생해서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실감 나게 느껴지도록 한 것 또한 뛰어난 연출력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진실'이라는 건 정해져 있지 않고, 믿는 사람, 이야기를 쓰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를 종교와 먼 혁신주의자로 그리면서 영화는 신의 존재와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파이는 끊임없는 의심이 믿음을 더 강하게 해준다는 말을 하는 등, '믿음'이란 맹목적이 아니라는 태도 또한 갖고 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에는 신의 존재와 종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에 관해서는 아무도 없는 바다에 소년을 밀어 넣고 ‘인간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문제를 제시하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듯 의문을 남긴다. 판단은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