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커피로 위는 맥주로 마음은 글로
몇 해동안 성당을 오가며 알게된 분이 있다.
태도가 늘 긍정적이고 밝은, 언제나 밝은 미소로 주일학교 유초등부(에 재학중인 자녀가 있는 엄마들 중 대표적인 아싸)학부모 중 한 명인 나에게 기꺼이 살갑게 인사해 주시는 분. 웃는 모습이 시원시원하고, 남을 잘 돌보는 품성이 매력적인 분.에서 끝났던 존재였다. 가까울 일도 이유도 없던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서서 딱 하나의 얼굴이 서로의 전부인 양 지냈던 사이. 그러던 어느 날, 변두리의 나를 불쌍히 여겨 적당한 자리(성격 좋은 사람들의 모임)에는 늘 불러주는 고마운 동생 덕분에 그들의 나들이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즐겁고 사소한 잡담과 웃음이 이어지다, 그가 최근 진지하게 등단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뭐라고요?! 제일 재미있는 글이 내가 아는 사람이 쓴 글인데!
나는 조르고 졸라 그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 글을 읽게 해달라고 주기적으로 졸라대서 몇 편을 더 읽었다. 세상에, 재밌어라! 앞뒤 꼭꼭 맞고 위부터 아래까지 구석구석 단정한 글을 읽는 것만큼 마음이 평온해지고 환해지는 것도 없다. 그의 글은, 길이도 구성도 소재도 표현도 알차고 다정했다. 흡족한 몇 편의 글을 읽고 난 뒤, 난 그를 언니가 아닌 김작가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삶에는 가끔 위로가 필요하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시달리고 시달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이 미안해지는 날. 견뎌내기 힘든 삶의 시련들이 뱃속을 헤집고 역류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고 그 독기가 스멀스멀 입 밖으로 넘실거릴 때, 나는 허둥지둥 글을 찾는다.
가장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는 탄탄한 글은 남궁인 의사의 글이다. 몇 해 전에 그의 책을 읽고 블로그를 찾아 저장해 둔 이후로,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있다. 나에겐 호흡이 살짝 긴 느낌이지만 그의 글은 짜임이 좋고, 재미있고, 우울(완.전.취.저)하고, 많다.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답게, 여러 번 읽게 되는 대단히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즉각적이고 확실한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기에 그의 글에 늘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30대에는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가 있다.
나는 떠올리는 것으로써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세 걸음 이상 다가오지 않아준 배려 깊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아준 한결같았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혼자서 설레어한다. 세 걸음 이상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우정을 다하는,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설레어한다. - 김소연, <시옷의 세계>
나는 왜 김소연 시인의 글이 왜 이렇게 좋을까 생각해 보니, 조심스런 망설임과 산들 바람 같은 잔잔함, 그 사이를 맴도는 옅은 녹차향기 앤드 두근두근 그리고 눈물 반짝..................아몰라 너무 좋아. 제 취향입니다.
재외국민으로 살다보면 생각보다 이별이 잦은데, 대부분은 주재원 가족으로 오셨다가 떠난다. 나를 살뜰히 챙겨주던 그가 2020년 초에 이 곳을 떠난 뒤, 우리는 시대를 거스르는 '펜팔 친구'라는 촌스러운 이름으로 이메일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차때문에 카톡을 하기가 미안해서'라는 이유로 이메일을 보냈지만, 나는 곧 우리 사이에 서로 글을 나누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글은 그 만큼이나 아름답고 유쾌하다. 그리고 부드럽고 단호하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다듬으며 하루하루 기운 넘치는 열정적인 워킹맘으로 살고 있지만, 그도 나처럼 가끔은 지치고 때로는 작아지는, 다정한 토닥거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언제나 그는 나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따뜻한 말을 건네고, 큰 용기를 나누어 준다.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물해 주고, 뜨거운 마음을 누른 채 나를 기다려준다. 일상에 쫓기는 우리의 대화는 조금 느릴 뿐,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다정하다. 김소연 시인도 남궁인 의사도 아마 높은 확률로 다정한 사람들일 것이다. 다정한 사람들은 나의 수고와 너의 수고를 포개어 덧댈 줄 알고, 나의 실수와 너의 실수를 함께 덮어 누를 줄 안다.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포자기 한 채 웅크려 앉은 채로 오늘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이다. 그저 한 순간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일일 지도 모르지만 그 다정함은 늘 성난 나를 진정시키고 다독인다. 다정한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글의 위로와 사람의 응원을 받는다.
삶은 좌절과 고통과 지겨움과 답답함을 가지고 와 빈번히 나를 쑤셔댄다. 내 인생만 그런 거 아니겠지. 기쁘고 즐거운 일들은, 솔직히 너무 부족해. 불쑥 불쑥 마음의 결핍이 나를 꼬집어 대기 시작하면, 서둘러 글을 찾아 읽는다. 보통 그렇다. 짧고 아쉬운 잠깐의 위로다. 그렇지만 이게 또 강력해서, 나에게는 이거만한 게 없다.
오늘도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