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_<데미안>에서
#1.
“나는 그렇게 안 느껴봤다니까!” 지금에서야 내 헛소리를 들어준 친구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건 완벽한 헛소리였다. 또는 공감 능력이 1도 없는 경험주의자의 반페미니즘anti-feminism 선언이었거나. 그날 친구와 나는 맥주 몇 잔에 취해 페미니즘 얘길하고 있었다. 나의 주장은 이것이었다. 남자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여자도 반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 뭐, 맞는 말이긴 한데, 내 근거가 이상했다. “난 내가 여자로서 차별받고 있다, 불평등하다, 아니면 불공평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 봐봐, 난 여중여고를 나왔어. 거기선 선생님들이 ‘넌 여자라서 국어를 잘 해’, ‘넌 여자라서 체육을 못 해’라고 말 안 해. 왜냐하면 다 같은 여자애들이거든, 그냥 능력에 따라 누구는 이걸 못하네 누구는 저걸 잘하네 하는 거지. 그리고 난 첫째 딸이고 세 자매 중에서 맏이야. 우리 엄마아빠는 나한테 여성스러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되레 아주 공평하게 키워줬지. 날 리더십 있고 용감한 사람으로 키워주셨어. 나에겐 대통령을 하라고도 아주 많이 말씀하셨어, 너도 알잖아. 결론은 난 내가 여자로서 차별 받지않고 컸다는 거야. 그래서 난 내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휴. 내가 했던 헛소리를 돌이켜보는 건 정말 고역이다.
#2.
오늘(11일) 나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주최하는 3.8세계여성의날 행사에 참여하고 왔다. 일터에서의 성평등이 주제였다. 고용 불평등, 임금 불평등, 페미니즘 불평등, 투자 불평등 ... 불평등을 나열하라면 끝이 없다. 일터에 진입(고용 시작 또는 출근)할 때 부터 일터에서 나갈(퇴근 또는 퇴직) 때 까지 여성들은 줄곧 불평등과 싸워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오늘 자리에서 얼마나 고개를 끄덕거렸는지 모른다. ‘면접 때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 들어봤지, 암.’ ‘최종 합격자는 늘 남자가 많지, 맞아 맞아.’ ‘대박, 나도 여성 임원에 대해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을 거란 편견을 가졌던 거 같아 헐 대박이다 정말.’ 등등. 이미 경험해본 일, 생각해본 일, 나조차 생각 못하고 있었던 일 등등이 젠더 불평등으로 나타나있었다. #1에서 헛소리를 그렇게 해놓고, 왜 #2에서 반성하는 척이냐고? 알에서 나오기 위한 투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3.
그 잘 나신, 콧대 높은, 한껏 가부장적 마인드를 흡수한 나라는 여자가 알에서 어떻게 나오게 됐냐고? 내 눈앞에 ‘알’이 있음을 경험하고 나서다. 대망의 최종 면접을 며칠 앞둔 날. (그렇다, 나는 취준생이다.) 목요일 하루이던 면접 날이, 화요일 하루 더 늘어나 이틀 간 치른다는 소식을 우연찮게 듣게 됐다. 아니, 그냥 자세히 얘기하자면, 2차를 통과한 사람들끼리 모여있던 오픈채팅방에서, 3차에 진출하게 된 사람들(나 포함)이 자신의 기쁜 소식을 알리며 면접은 ‘목요일’이라는 말을 꺼냈다. 2차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사람들은 그들을 부럽다며 말했고 이내 그 카톡방은 잠잠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혹시 화요일에 면접 보는 분은 없나요?’라는 말이 오픈채팅방에 떴다. 몇몇은 자신도 화요일에 면접을 보게 됐다며 자신도 3차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 바닥 시험은 그럴 수가 없는 구조. 필기 시험에 과락이 있거나 커트라인이 있다면 한꺼번에 발표했으면 될 일. 시간 차를 두고 추가 합격자를 냈다고? 주위를 수소문 해보니, 추가 합격 그러니까 추가로 면접 기회를 얻게된 사람들은 남자 지원자들이었다. 어허 이게 무슨 성차별적인 채용이람?언론사란 놈들이 이렇게 비민주적이어도 되나. 하지만 나는 일개 지원자고, 내가 뚫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면접장을 찾았다. 면접 당일, 아니나 다를까 내가 면접을 본 목요일은 여자가 9 남자가 1의 비율로 면접을 보러왔었다. 심지어 내가 면접을 본 조는 모두 여자였다. 아하, 그런 거였군. 필기 시험은 이름만 보고 실력으로 뽑았는데, 뽑아놓고 보니 최종 면접 대상자에 여자가 너무 많았던 거다. '에구머니나, 이러면 안 되지. 남자를 뽑아야 하는데 말야.' 이렇게 생각했던 윗분들께서 필기시험을 친 남성 몇몇을 골라 ‘화요일’에 면접을 보게 했을 것이다! 그 후 최종 합격자 명단을 보니 우리 조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시간 대에 면접을 본 다른 조 여자들도 합격자 명단엔 없었다. 1,2차의 그 심각한 성비 불균형을 깨고, 최종 합격자 명단엔 남자가 6 여자가 4의 비율로 올라와 있었다. '성별 쿼터제로 이득을 보는 건 남자 아냐?' 이를 경험하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달리 보였다. 그럼 지금까지, 1차 서류는 여자가 9 남자가 1의 비율로 통과했는데, 최종 합격자엔 여자가 4 남자가 6의 비율로 있었던 모든 내가 치른 시험들은, 성별 불평등으로 덕지덕지 쳐발쳐발된 시험들이었나? 맞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경험하지 못했던 불평등이, 사회로 첫발을 디디려고 하니 훅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 경험에서 깨달은 이후, 이전의 경험들과 그 이후의 경험들을 지나면서, 나는 점점 불평등에 분노할 줄 아는 시민이 되었다. 내가 명예 남성이었구나, 여성들이 느꼈을 불평등에 1도 공감을 못했던 냉혈한이었구나. 그런 후회가 들자 더욱 노력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4.
이런 나조차도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닌 사람들은 뭐지? 성접대하고(승 모 씨), 성관계 몰카 돌려보고(가수 정 모 씨), 누군가의 꿈을 빌미로 성추행하고(장자연 10주기를 추모합니다), 위계 좀 있다고 성폭력 행사하고(스포츠, 정치, 학계 등). 대체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래, 노력은 굳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좀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간.답.게. 문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내 앞에 있는 이 human을 보면서 인간답게 대우해주는 정도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답답합니다, 답답해요. 무슨 우유 당번 했다고 성차별 받았다고 하고, 나 취업 못하는 게 다 여성 탓이라고 하고. 그러면서 리벤지 포르노 돌려보고, 지하철서 몰카 찍고 하죠. 제발 인간답게 삽시다 다들.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 모르면 이런 ‘서울시여성가족재단’ 같은 곳에서 하는 행사나 강연도 좀 다니고, 인간들이 읽는다는 신문이나 잡지도 좀 읽고, 책도 좀 보고, 말이죠. 다들 그렇게 살아서 언제 알에서 깨 나오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