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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Dec 19. 2019

예민한 남자아이의 고충, 사내 새끼 4종 세트


  현재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고,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남존여비의 조선시대로부터도 대략 2세기가 지났고, 선진국일수록 성역할이 평등하다는데 경제규모만으로는 세계 28위랍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국산 만화보다는 일본 만화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2003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뽀롱뽀롱 뽀로로>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 만화산업의 눈부신 발전을 목도했습니다. 만화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뽀롱뽀롱 뽀로로>의 등장인물들의 성역할은 고리타분합니다. 여자는 요리를 좋아하고, 남자는 과학을 좋아합니다. 여자 캐릭터가 하나 더 있는데 운동을 잘합니다. 성 고정관념을 탈피한 캐릭터 안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요리하는 캐릭터가 여자인 데다, 친구들이 모두 모이면 남자들은 모두 식탁에 앉아있고, 이 두 여자만 식사 준비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구시대적인 성역할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의외로 남성에게 부여되는 고정관념도 있습니다. 특히나 용맹, 적극, 우두머리 등 저 멀리 초원의 수컷 맹수에게 경쟁력이 될 법한 요소들이 첨단 도시 생활을 하는 우리 남자 인간들에게도 강요됩니다. 문제는, 우리의 예민한 남자아이들은 용맹하게 돌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먼저 나서고, 개인의 개성을 뭉뚱그려 하나의 집단으로 엮어가는 모양새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예민한 남자아이들은 오히려 낯선 장소・상황・사람 앞에서 조심스럽고, 익숙한 상황에서 활발하며,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특히나 이런 특성이 사회화가 이루어지기 전이라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유아동기에는 “사내 새끼가...”라는 핀잔을 더러 듣게 됩니다. 제일 빈번한 상황은 인사입니다. 얼굴만 아는 동네 어른들과 마주쳤을 때,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지 않으면 바로 “사내 새끼가 수줍음이 많아가지고 어디다 쓸래”라는 전국구 성별 연령 불문 고정 멘트를 듣게 됩니다. 더러는 모르는 분들이 아이가 귀엽다고 이런저런 말을 겁니다. 대개는 몇 살이냐로 시작합니다. 이때 고성의 즉답이 나오지 않으면 또 그 고정 멘트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이 멘트는 귀여워서 무슨 말이든 주고받고 싶은 아이와 세련되게 대화를 주고받는 법을 모르는 어른들의 공격형 방어 멘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 어른들은 대답을 잘하는 아이에게 대답을 잘한다고 칭찬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아이가 귀여워서 말을 걸었고, 아이는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환상적인 욕구를 가지신 겁니다. 그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긴 실망을 아이를 탓하는 수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엄마들은 이런 말에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존중하는 어른은 상대방을 함부로 폄훼하지 않습니다. 


  친화력이나 외향성도 그중 하나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 드라마들이 꽤나 인기였습니다. 방송사별로 어린이 방송 시간대에 일일극처럼 정규적으로 방영을 했습니다. 대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이 많았고, 여자인 주인공은 한 편 정도만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데다 사려 깊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누구와 어디서 마주쳐도 상황을 주도하는 말을 술술 합니다. 마치 국민 mc 유재석 씨 같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여러 사람을 대하면서 그 날의 사건을 사려 깊게 해결하는 겁니다. 저는 선생님을 어려워해서 앞에만 서면 목소리가 작아졌던 저 자신과는 무척이나 다른 그 주인공의 모습이 부러웠는데요. “숫기가 없다”는 비평을 많이 접한 저로서는, 다른 아이들은 무난하게 해내는 일을 나만 못하는 멍청이라고까지 여겼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어린이는 현실감각이 떨어지기에 그때는 그런 심각한 고민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요즘도 심심찮게 아역 캐릭터들이 그런 양상입니다. 외향적이고 적극적이고 주도적이고 사려 깊습니다. 아주 꼬마로부터 큰 꼬마까지 누구에게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잘 말하는데, 감동의 포인트는 성숙한 어른 수준의 지혜로운 발언입니다. 극적으로 잘 팔리는 아이 캐릭터는 귀여운 아이 외모와 천진난만한 언행이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내용물은 어른의 성숙함입니다. 특히나 그 사회가 가치 있다 여기는 강점들의 집합체입니다. 어떤 드라마를 봐도 주인공은 대개 외향적이고 적극적이고 주도적인데 사려가 깊습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그렇습니다. 특히 남자 캐릭터는 더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성향을 좋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민한 남자아이들은 역시나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제 아들이 7세 때 유치원에서 동극을 많이 했습니다. 발표를 위한 연극이 아니라, 수업 중 읽은 책의 내용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 역할을 나눠서 극으로 꾸민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 예민한 아들은 ‘조명’을 맡았더군요. 극 중 역할은 극구 거부해서 선생님께서 할당하신 임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 점을 이상하다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뭐랄까 극 중 인물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데 그걸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아이들을 더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아들이 자신의 그러함을 그러하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 건강한 것 같아 안심이 됐습니다.


태권도장도 그 중 하나입니다. 남자 아이들이 사교육 시장으로 진출하며 반드시 거치는 코스가 바로 태권도장입니다. 태권도는 올림픽 공식종목이기도 하지요. 종주국답게 동네마다 하나 이상의 태권도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권도장은 유치원이나 학교 앞으로 차를 몰고 데리러 옵니다. 방학이면 야외로 특별활동을 데리고도 갑니다. 줄넘기도 하고, 피구도 하면서 몸도 많이 튼튼해 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본 예민한 유아들은 하나같이 태권도장을 싫어했습니다. 그 중 가장 재밌었던 반응은, “나보고 이런 걸(?!) 하라고?!”라고 한 9살 남아였습니다. 그 아이는 타고난 영재인데다 예민한 모든 특징을 가졌습니다. 정보를 사유하고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그 아이에게 태권도장의 수업은 마치, 육식파 도깨비 김 신씨 눈에 ‘상스럽다’고 보이는 저승사자의 채식 밥상과도 같았나 봅니다. 제 아들도 7세에 친구들을 따라 태권도장에 갔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웅웅거리는 쩌렁쩌렁한 태권도식 기합 발성 때문인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라며 결국은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다른 예민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태권도장에를 가는데, 근처에서부터 안 가겠다고 하여 돌아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엄마가 이번에는 축구 수업에를 가 보았답니다. 태권도보다는 마음에 들었는지 그 아이는 장기 수강을 하게 됐는데, 다른 포지션은 절대로 하지 않고 골키퍼만 한다고 합니다. 남편의 직장 선배의 예민한 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중학생인데 야구를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때 축구를 시작했는데, 축구를 좋아하고 잘 하지만 축구가 싫다고 했답니다. 이유인즉슨 몸 부딪침이 많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야구로 바꿨더니 굉장히 만족하며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적도 좋아서 야구 명문 고등학교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대한민국 남자들이 모였다 하면 하는 이야기. 3위 축구, 2위 군대, 1위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라는 우스갯소리인데, 근거 없는 우스갯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가 꽤 많습니다. 특히나 축구시장이 큰 유럽이나, 해외에서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되는 길이 그 나라에서 성공하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인 남미의 몇 몇 나라에서는 그 열기가 더 뜨겁습니다. 하여튼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도 남자들이 여럿 모이는 행사에는 축구가 거의 들어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하는 축구는 두 말하면 잔소리요, 회사 체육 대회에도 축구, 동네 조기축구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축구 잘 하는 아들을 바라는 아빠들도 꽤 보입니다. 축구를 한다면 꼭 스트라이커여야 한다고 원하는 아빠들도 있고요. 열망입니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열망이지요. 이 열망의 실체를 파헤쳐보면 열망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민한 남자아이들은 그 열망의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문화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는 아무래도 예민한 남자아이들에게는 불친절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좋다고 혹은 ‘그 정도는 돼야지’라고 기대하는 남자아이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친화력甲 국민mc처럼 대화하고, 태권도로부터 시작해서 축구왕 슛돌이 정도는 돼야 하며, 무엇보다도 초원을 호령하는 수컷사자 정도의 리더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국민mc 유재석은 한 명이요,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다 유단자는 아니지요. 축구는 하지만 공만 차는 수준이요, 팔로워없이 리더가 있을 수 있나요. 결국은 자세히 파헤쳐보지 않은 열망 때문에 쉽사리 아이에게 “사내새끼가...”라는 말을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게다가 우리의 예민한 아이들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면 뭐든지 우수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평가로 다음 싹을 틔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떡잎을 해치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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