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감정&뇌 발달(4)
제대로 감정하는 법을 모른다면 대개는 적절한 감정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역사가 있습니다. 슬퍼서 울고 있는데, 뚝 그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는 협박을 받거나, 애석해서 화를 내고 있는데, 조그마한 녀석이 어디 어른 앞에서 화를 내냐며 혼이 나거나, 억울하게 혼이 나서 속상한데 혼날 짓을 했으니 혼난 것이 아니겠냐며 오히려 내 탓을 당한다든지 등의 피드백을 받는 겁니다. 아이 세상의 절대자인 엄마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데다 그런 피드백까지 받으면 상처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마들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자신도 자신의 엄마로부터 감정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그 아픈 역사를 반복하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부적절하다 함은 어쩌면 상처의 흔적인 것도 같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상처가 꽤나 있었습니다.
아들이 6세 때, 디즈니주니어라는 만화 채널을 종종 봤습니다. 그 날은 <소피아 공주>라는 만화가 방영되었습니다.
대략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소피아라는 소녀는 공주입니다. 원래는 엄마와 단 둘이 살던 평민이었는데, 엄마가 왕과 재혼을 하면서 공주가 되었습니다. 소피아는 용기가 있고 지혜롭습니다. 소피아가 또래의 왕자, 공주들과 사건을 해결해 가는 스토리가 많습니다. 어느 날은 자신의 친구인 토끼와(소피아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변덕쟁이 얼음여왕이 사는 꽁꽁 얼어붙은 숲 속에서 사건을 하나 해결해야 했는데, 실수가 실수를 부르는 연쇄적인 불운을 겪게 됩니다. 하루 종일 실수를 연발하다 꽁꽁 얼어붙은 토끼와 소피아는 결국 지쳐서 마법 목걸이에게 자신들을 도와줄 디즈니 공주를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소환된 공주는 영문을 묻고, 소피아는 하루 동안 벌어진, 잘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 못된 연쇄적인 실수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모든 얘기를 듣고 공주가 한 첫마디가 바로, “참 힘든 하루였겠구나!”였습니다.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제 상처 입은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마치 가톨릭 미사 중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의 한 구절처럼 말입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공감의 경험이었습니다. 공감에 대한 무수한 책과 글을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던, 문자로만 이해했던 것을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속상한 데 혼난 경험이 많다 보니, 힘든 일이 생기면 그 정도의 일도 해결하지 못하는 바보라며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유년기의 마음이 그 한 마디에 풀리면서, 그때에야 공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목걸이가 소환한 공주님은,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어야지”가 아닌, 잘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 되지는 않고 일만 더 커져서 속상한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어떤 아이 엄마가 책에서 읽은 “그랬구나”를 이렇게 응용한 사례를 보았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 위해 일단은 그랬구나라고 하며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아이가 하는 모든 말에 “그랬구나, 우리 oo이가 슬펐구나”, “그랬구나, 우리 oo이가 기분이 나빴구나”라고 해줬더니 아이가 오히려 화를 냈다며, 전문가의 조언이 잘 못된 것이 아니냐는 글이었습니다. 그 엄마의 그랬구나는 마치 요리에서 간을 맞추고 불 조절을 해서 맛을 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 빼고, 재료만 그럴싸하게 섞어 겉모습만 먹음직스러운 음식 같았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헤아려보고 그 감정을 알겠다는 말로 그랬구나를 써야 했는데, 일단은 그랬구나를 하며 아이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기만 했으니 아이는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요. 놀림을 받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저에게도 공감이란 단순히 상대방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내거나, 기계적으로 상대방이 한 말을 거스르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는 선이었는데, 공감을 받아봄으로써 공감의 정체를 실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감은 그동안 제 변연계에는 없던 새로운 회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속상한 아이를 다루는 방법에는 공감과 위로도 있구나!’라고 말이죠. 알아야 보인다는 말처럼, 공감을 받아보니 공감이 보였습니다. 또한 해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저런 엄마에게 혼이 난 이유는 내가 잘 못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공감하는 법을 몰라서였기 때문이라는 진짜의 이유를 알게 되니, 고작 그런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바보라는 제 자신에 대한 책망도 사라졌습니다. 상처의 치유였습니다.
제가 들어본 엄마의 공감 사례 중 제 친구 엄마도 감동입니다. 친구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는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비싼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보면 여느 아이처럼 엄마에게 사달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오이 값 들어오면 사줄게”, “콩 팔아서 사줄게”라고 하셨답니다. 안 돼, 돈 없어라든지 그런 걸 살 돈이 어딨니와 같이 여느 엄마가 하는 일방적인 거절의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다고 합니다. 친구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갖고 싶었던 마음이 다음 날이면 기분 좋게 사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로서 잠깐 그 물건이 갖고 싶었던 거였고, 엄마는 그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아주신 거기에 그걸로 충분히 기분이 괜찮아졌다고 또렷이 기억했습니다. 그 친구는 참 다정한데, 그 다정함이 어디서 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습니다.
감정 회로를 다시 만드는 것, 어찌 보면 공부나 훈련과도 참 비슷합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과 감정하는 법을 더 좋은 사례를 보며 연구하고 배우고 경험으로 익히면 언젠가는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참 힘든 하루였겠구나”를 수첩에 써두고, 한 동안 아들을 비롯한 남편, 친구, 이웃들에게 많이 써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꽤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감 능력이 떨어지거나 감정이 메말랐다고 느껴지는 자신이 잘 못 됐다고 생각된다면, 자책보다는 상처 받은 지난날의 나를 애도하며 힘들게 지내 온 어린 날의 나에게 수고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로 애쓰셨습니다.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