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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Dec 24. 2019

시공과 종을 초월한 공감의 화신이자 도덕 교과서

  좌뇌가 논리적으로 정보를 분석한다면, 우뇌는 정서의 뇌이자 직관의 뇌입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대개 직관적입니다. 직관적이라 함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는 겁니다. 드라마의 몇 장면과 대사만 보고도 전체 이야기를 꿰뚫는 사람이라든지, 몇 몇 팩트만 가지고도 그 팩트에 관련된 사람들의 성격과 향후 선택 방향을 맞추는 사람들이 바로 직관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민한 아이에 관한 고민 중 까다로움과 쌍벽을 이룰만한 것 중 하나가 “우리 아이가 너무 규칙을 잘 지켜요”입니다. 규칙을 잘 따른다는 것은 전체의 사람이 모두 그러할 때는 정말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각자의 이해를 추구함에 있어서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며, 타인으로 인한 침범 없이 모두가 안심하고 평화로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좋은 덕목이 왜 고민거리일까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경험이 누적되어서 입니다. 요령껏 편법을 써서 이익을 달성해도 제재나 불이익이 따르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규칙을 준수하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것과 같죠. 그러니 규칙을 잘 지키는 내 아이가 걱정이 되는 겁니다.

  예민한 아이들이 도덕 교과서처럼 규칙을 잘 지키는 이유는 직관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든 일을 하나하나의 개별 사실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맥락으로 파악합니다. 그래서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순차적으로 일어날 일과 결과를 미리 압니다. 결국에는 선생님께 규칙을 어긴 내가 혼이 날 것이라든지, 규칙을 어기는 일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거죠. 

  제 아들이 5살에 처음으로 유치원에 갔을 때, 반에는 아들 체구의 1.5배에 달하는 7세 평균 크기의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의견 조율이나 감정 조절에 어려움이 있어 이미 근 1년을 놀이치료를 받아 오던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들과 조율이 안 되면 일단 상대에게 무력을 행사했는데, 제 아들도 피해자 중 하나였습니다. 같이 때려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니, “그러면 나도 선생님에게 혼나”라고 했습니다. 덩치에서 밀린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치원 규칙 중 제1 규칙이 친구와 싸우지 말 것이긴 했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서도 자신을 때리는 반 친구에게 똑같이 무력을 행사할 것을 제안하면 여전히 “때리는 건 나쁜 거야” 라고 합니다. 괴물을 상대하려면 괴물이 되는 걸 조심하라고 니체가 그랬나요? 니체도 아닌 녀석이 맞고 오기만 하니 속은 상하지만, 아이의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기자는 3년 전에 EBS에서 방영한 소방관의 일과를 밀착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여기서 한 노래방 앞에 소방차를 주차하고 불도 끄고 사람도 구조를 하고 있는데, 노래방 주인이 “영업장 앞에 버젓이 주차를 해서 영업을 방해하고 있으니 소방차를 빼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겁니다. 그 방송이 나간 후, 관련 기사에는 해당 노래방 주인의 이기심을 성토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나 봅니다. 기자는 그래서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 분이 자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의 지적을 받았으니 마음이 달라졌지 않았을까 기대를 한 거죠. 하지만 그 주인은 여전히 “영업장 문을 막은 영업 방해 소방차”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비도덕적이면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은 본인에게는 이득일지 모르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확실히 해악입니다. 

  활발한 우뇌는 직관뿐만 아니라 정서적이기까지 하니, 예민한 아이들은 쉽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합니다.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일체감을 느낍니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이로 착각해서 먹고 죽은 고래를 보고 오랜 동안 슬퍼하거나, 내전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며 내 일처럼 고통스러워하죠. 인류 전체로 보면 분명히 남의 일도 내 일처럼 감정이입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득이 발생할 겁니다. 

  예민한 사람들의 유별난 공감력 중 재미난 부분이 있습니다. 저의 사례입니다만, 저는 역시나 다른 사람은 이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성실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천주교인인데요, 천주교 미사는 그 내용이 교황청에서 내려옵니다. 전 세계의 천주교인이 같은 날에(시차는 있겠지만요) 같은 내용의 미사를 참례하는 거죠. 게다가 이 미사의 내용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굉장한 감동을 느낍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미사를 거행하는데다, 수백 년 전의 오늘에 미사를 참례했던 사람도 같은 내용의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제 경험 상, 이 전율에 공감하는 사람보다는 유난을 떤다는 사람을 더 많이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 공감력은 확실히 인생을 풍부하게 합니다. 감동할 거리가 많다는 거니까요.

  도덕성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입니다만, 발달한 직관 때문에 요즘 아들에게 새롭게 생긴 고민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흐름과 죽음을 연관하여 생각하게 된 겁니다. 질문은 바로 시간이 흘러 자신이 어른이 되면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 죽느냐는 겁니다. 만으로는 5세, 7살 아이의 고민치고는 그 무게 너무나 무거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듣는 저도 마음이 무척 많이 아팠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지만 저 또한 사랑하는 아들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픈 마음은 절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무거운 마음을 최대한 밝고 신나게 바꿔보려고, “엄마가 120살이 됐는데도 미녀 할머니면 어쩌지?” 그랬더니 아들이 금세 재미나게 대꾸합니다, “엄마가 너무 미녀라서 다들 이모님(40대~60대의 비교적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제 아들 용어)인 줄 아는 거 아니야?”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영화를 만들겠노라며,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 줍니다. 거대한 폭풍이불어 닥쳐 마을 사람들이 휩쓸려갔는데, 죽는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사실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 겁니다. 그 폭풍은 바로 그 세상으로 연결되는 출입구였던 거죠. 그 다른 세상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었고, 폭풍에 휩쓸려온 사람들은 죽어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는데, 폭풍에 쓸려온 사람 중에 과학자가 있어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기계를 만들고는 다함께 돌아왔다는 SF재난액션영화였습니다. 아들은 엄마와 언젠가는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슬픔을 스스로 소화하는 방법 하나를 찾아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방법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공과 종을 초월한 공감의 화신이자 도덕 교과서인 우리의 예민한 아이들은 분명히 더 옳고 좋은 삶의 태도와 방법을 ‘그냥 알고’ 있을 겁니다. 또한 계속해서 찾아낼 겁니다. 엄마의 걱정보다는 응원이 더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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