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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Jul 26. 2019

예민아이엄마, 사람을 가려 만나다

  그런데 풍부한 감수성의 대상은 물건이나 오감으로 직접 체감되는 자극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더 많이 더 빠르게 알아차립니다. 이 또한 무슨 문제가 될까라고 여기기 쉽습니다만, 저는 민감한 오감보다도 이 부분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동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본인의 그러한 특징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라면, 불안한 사람 옆에 있어서 불안이 감지된 건데 그게 내 불안인지 상대의 불안인지 구분을 못합니다. 사회적인 관계망이 좁은 유아기를 지나 아동에서 성년이 돼가면서 많은 사람들 속에 있게 되면 이 점은 분명이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한 눈에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가려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떠올려 보세요. 우리의 예민한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말과 행동으로 속마음과 다른 겉모습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모르고 넘어갈 상대방의 부정적인 마음이 예민하게 감지되면서(의도하지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수동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마음도 불편해지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다 보니,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태입니다. 심증만으로 상대를 의심하는 건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이 상대방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모양새나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하는 모양새와 유사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 예민한 사람이 오히려 모가 난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의 작업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엄마의 감정을 잘 관리할 것, 둘째는 아이와 다른 사람 사이에 감정의 울타리를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감정 울타리에 대해서는 정서발달 챕터에서 더 자세히 다뤄 보겠습니다.

엄마가 감정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가려 사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만나고 나면 피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불친절한 동네 마트 직원같이 공적인 관계의 사람부터, 자신의 힘든 사정만 얘기하고 내 얘기는 들어주지 않는 친구나, 걱정이 너무 많아 자식의 숨통마저 죄는 엄마처럼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육아 중이라면, 특히 예민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중이라면, 내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어떠한 사람과도 멀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모든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호의적인 당신은 분명히 착한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멀리하는데 죄책감이 들겠지요. 하지만 그들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아이에게 친절할 수 없다는 사정을 우리의 아가들은 모릅니다. 더 안 좋은 경우는 엄마 자신이 다른 사람 때문에 에너지가 바닥났음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때입니다. 어떤 경우든 아기는 감정적으로 지친(‘기가 빨렸다’고도 하지요) 엄마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위기로 간주합니다. 엄마가 전과 같으면 위기가 해제됐다고 보는 아기다운 생각의 결과, 전보다 더 들러붙어 끈질기게 요구해 옵니다. 지친 엄마는 아기의 요구에 응할 기운이 없어 거절하고, 아기는 더 강력한 요구를 하는 악순환이 연출됩니다. 예민한 아기를 키우고 있다면 육아를 하는 시간을 오롯이 나와 아이를 위해 써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또한 나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상대를 가려서 사귈 것을 추천합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직장문제로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친가・시가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살다보니 저 혼자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아파트 바로 아래층 이웃과 친해졌습니다. 그 분은 저보다는 서른 살은 많은 할머니셨는데, 아기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낯선 사람이나 상황에 처했을 때 강하게 경계하는 제 아들에게 섣불리 덥석 다가가지 않으셨습니다. 아이가 거리를 둔만큼 당신께서도 멀리서 간식을 꺼내두시고는 가만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간식을 조심스럽게 먹으며 경계를 풀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도 그때서야 조금씩 아들에게 다가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두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할머니와 친해졌습니다. 친족의 개념이 흐린 유아시기에 아들은 “내 할머니는 세 분이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위층에 사는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목청이 꽤나 큰 분이셨습니다. 돌 무렵 아들은 뛰어 다닐 정도였고 산책을 즐겼는데, 맞은편에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거리가 가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 뒤로 숨어서는, 그 사람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야지만 다시 걸을 정도로 낯선 이를 경계했습니다. 영락없는 야생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제 아들과 마주칠 때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고는 쩌렁쩌렁한 명령조의 목소리로 “아가야 이리와”라며 두 손을 내미셨습니다. 아들은 잔뜩 긴장하며 제 뒤에 숨고는 절대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런 아들의 특성을 알고 있었던지라, “아이가 수줍음이 많아요.”라고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한 단계 더 전진하며, “얘는 나를 안 좋아해”라며 제 아들을 탓합니다. 상대방을 탓할 때는 자신의 억울함이 깔려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억울함의 호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할머니야 말로 우리가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쟤는 나를 안 좋아해”를 연발하셨습니다. 같은 라인에 살다보니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이 시나리오는 어김없이 전과 같은 장면으로 연출되었습니다. 몇 달을 이렇게 지내다 결국은 저도 멀리서 이 할머니가 식별되면 굳이 다른 길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특징은 아랑곳 않고 친밀하지는 않지만 귀여운 아기가 자신의 품에 안겨주길 바라는 그 소망자체가 부담스럽고 부당했기 때문입니다.

 살고 있던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우리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래층 할머니와는 일곱 살이 된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며 오붓한 시간을 갖습니다. 한참 어린 저에게도, 5년씩이나 교제를 하셨음에도 존칭과 경어를 쓰십니다. 매일이 아니라 한 달 정도의 시간차를 두어서인지 아들은 만날 때마다 곧바로 반가워하지는 못하고 수줍어하느라 시간을 좀 쓰기는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내자식이 무슨 수줍음이 많아?”와 같이 판에 박힌 핀잔이나 잔소리를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제 아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주십니다. 그 분과 만나는 저도 불편한 기분이 든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른 살 이상의 차이가 있지만 일상의 사소한 인간사로부터 역사,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확실히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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