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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수 Jul 26. 2019

예민한 아이들의 깊은 감수성_그렇게 태어났다


  시청률이 60%에 육박했던 드라마 <대장금>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린 장금이 생각시가 되어 요리수업을 받는 중에 음식을 먹어보고 단맛의 재료를 알아내라는 문제를 냅니다. 어린 장금만 홍시를 맞춥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홍시 맛이 나니까 홍시입니다”라고 답을 하는데요. 절대미각의 면모를 보여주는 답변입니다. 감각적으로 예민하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세세하게 느끼는 것으로 평균의 사람들보다 많은 정보를 단시간에 자세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예민한 사람 안에서도 예민한 감각의 영역은 달라서, 사람에 따라서 오감이 모두 예민할 수도, 특정 감각만 예민할 수도, 그 중 몇 개만 예민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감이 예민하다는 것을 신체라는 물리적 영역으로만 한정하지 말고 감정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해서 고려해야 합니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가 나는 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이 많으면 관련하여 느낄 거리도 많아지니까요. 이를테면 예민하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이 거의 비슷한 날의 반복이라며, 예민한 사람에게는 유독 노을이 더 붉은 날이나, 새 봄을 맞아 살짜기 나온 노란빛 연두의 아기 은행잎 등을 알아차리면서 신비해하거나 감동합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하죠. 

  그래서 감수성이 풍부한 예민한 아이들은 사소한 물건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깊은 감정을 가지기 쉽습니다. 제 아들이 두 돌이 지났을 무렵, 한창 유모차를 타던 시기에 자신의 발보다 두 사이즈 정도 큰 신발을 물려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유모차에 앉힌 채로 하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그 신발이 벗겨져 떠내려갔습니다. 아들은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난 하천의 유속이 빨랐지요. 열심히 쫒아가 봤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야”라면서 그 분실을 ‘잃어버린 사건’이 아닌 ‘앞으로도 없는 상태’로 파악하며, 그 날 내내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 시기의 아이들이라면 소유개념이 발달해서 생긴 일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7세가 된 봄날에 5세 때 입었던 스웨터가 그립다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감수성이 풍부한 게 맞습니다.

  디즈니사에서 만든 <멋쟁이 낸시 클랜시>라는 유아동용 만화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낸시는 대략 7~8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동생은 그보다는 2~3살 정도는 어려보입니다. 어느 날 낸시는 여동생 방 어항 속에 금붕어가 죽어있음을 발견합니다. 낸시는 동생이 그 사태를 보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며 그 금붕어와 똑같이 생긴 금붕어를 구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여동생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힘에 부친 낸시는 결국 우앙 울음을 터뜨립니다. 당황한 엄마는 이유를 묻고, 금붕어가 죽었다는 슬픈 사실을 동생이 몰랐기를 바랐던 낸시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동생이 아무렇지 않게 나와서는, 금붕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겁니다. 키우던 금붕어의 사망이 낸시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면, 여동생에게는 그냥 일어나는 일이었던 거죠.

  저는 낸시보다는 금붕어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동생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실제로 저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오래 지녀온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물건이든 생명체든, 그것과 함께하며 지내온 시간 동안 깊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단순히 내 물건이라는 소유욕을 넘어서 나의 감정을 공유한다고나 할까요? 이 에피소드는 낸시의 그런 심리상태를, 낸시가 금붕어와 함께 보낸 시간 동안을 떠올리는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 어항 속을 보면 금붕어가 보입니다. 뻐끔뻐끔 거리며 자신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같죠. 신발을 하천에 빠뜨려 흘려보낸 날 제 아들은 낸시보다는 어렸지만, 아마도 저나 낸시처럼 그 신발을 신고 다녔던 여러 장소나 상황, 그와 관련된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며 슬퍼했던 게 아닐까하는 짐작이 갔습니다. 예민한 아이의 물건을 처분할 때는 반드시 이 점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다 낡아빠진 신발 한 짝도 정을 나눈 친구와 같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수성이 풍부한 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은 낸시의 여동생과 같이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으며, 그 다수가 소수를 인정하지 않고 특이취급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치부할 때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남자에게 대범함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남성들은 섬세한 감성 발휘가 특화된 직군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남성성이 떨어지는 시시한 존재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예민한 사람들이 왜 감수성이 깊은가에 대해서는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타인보다 예민한 사람들은 우뇌의 활동이 더 활발하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우뇌는 외부 자극을 감정과 정서로 처리합니다. 좌뇌는 외부자극을 순차적이고 조직적으로 즉, 논리를 구성하며 처리합니다. 우뇌가 느낀다면 좌뇌는 분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 연산을 잘한다거나 논리적인 언어 구사를 잘 한다면 좌뇌가 우세한 사람입니다. 유머나 은유, 표상, 비유에 능한 사람은 우뇌가 우세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이세진 옮김, 부키(2014), p.67). 

 예민한 사람들의 깊은 감수성은 바로 이 활발한 우뇌활동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감수성이 깊도록 만들어진 몸이라는 뜻입니다. 감수성이 깊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느낀다는 말인데요. 낸시의 동생에게는 감정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일이 낸시에게는 깊고 강렬한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표현하면, “별일도 아닌 걸로 유난을 떤다.” “사소한 일에 일일이 마음을 다 쓰고 살면 큰일을 못한다.”와 같이 존재 자체가 부정을 당하는 피드백을 자주 받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아이의 감정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고 감정을 억압하죠. 하지만 감정은 풍선과도 같아서 한쪽을 꽉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다 결국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버리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민한 아이들은 감정이 고장나기 쉽습니다. 혹은 감정적으로 교감할 대상이 적어 고독하기도 쉽습니다.

  감동하거나 화가 나거나 기쁘거나 슬픈 등 감정을 느끼면 여러분은 먼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화는 속으로만 삭이면 화병이 됩니다. 크고 강한 자극일수록 더더욱 해소하고 싶습니다. 누구는 술을 마셔서, 누구는 피아노를 연주해서, 누구는 운동을 해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을 풀어볼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잘 풀어집니다. 그런데 예민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격렬한 감정을 느끼니 일일이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상대가 없는 세상은 너무도 고독합니다. 또한 풀어야할 감정이 많고 크다보니 정신적으로 쉽게 지치게도 됩니다

  우리는 흔히 크든 작든 목표를 달성하려면 감정을 제거하고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목표를 설정할 의지가 발동하고 행동을 유발하는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자면, 스카이캐슬의 예서가 서울대 의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죽기 살기로 학업에 매진하는 데에는 서울대 의대에 반드시 들어가고 싶다는 강한 감정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거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없앨 게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합니다. 또한 감성은 이성이라는 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빗물과도 같습니다. 우리 예민한 아이들이 깊은 감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적절히 공감하면서 감정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풍부한 감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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